성종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 의순공주의 묘. 의순공주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에게 시집갔다가 다이곤이 죽은 후 귀국했다. 묘는 의정부에 있다. |
효종은 원손(元孫)의 자리를 대신한 정당성을 북벌에서 찾았다. 그러나 강화조약에 군비 증강 금지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시선을 속이면서 군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러자면 표면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효종 원년(1650) 3월 청나라 사신 파흘내(巴訖乃)가 가져온 국서가 일종의 전기를 마련했다. 상처(喪妻)한 섭정왕 다이곤(多爾袞:1612~1650)이 “예부터 황제국은 번국(藩國)의 정숙한 여인을 가려 비(妃)로 삼는 전례가 있었다”면서 “국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대신의 딸 중에 정숙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명나라 때도 많은 조선 여인이 북경으로 갔다. 태종은 재위 8년(1408)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의 요구에 따라 5명의 반가(班家) 여인들을 북경으로 보냈는데, 고 전서(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은 명나라 현비(賢妃)가 되고, 전 전서(典書) 임첨년(任添年)의 딸은 순비(順妃)가 되었으며, 나머지도 모두 후궁이 되었다. 태종 17년에도 명 성조는 내관 황엄(黃儼)을 보내 다시 요구했고 한확(韓確)의 누이동생 한씨와 황씨를 북경으로 데려 갔다. 그때는 내심으로도 상국으로 인정하던 명나라 때였으나 황엄이 황씨 집을 방문했을 때 황씨가 화장도 하지 않고 눈물 자국이 있다는 이유로 화를 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외국으로 가기를 꺼렸다. 하물며 속으로 오랑캐라 업신여기는 청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반가 여인은 없었다.
그때 성종의 8남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후손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그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높이고 오빠 이준(李浚) 등에게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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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이곤은 의순공주가 청 조정에서 자리도 잡기 전인 순치 7년(1650) 12월 수렵 도중 말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로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듬해 정치 보복이 자행되어 다이곤은 봉호(封號)가 박탈되고 시신의 머리가 잘렸다. 그러자 이개윤은 효종 6년(1655) 동지사로 갔다가 딸의 귀환을 요청했고 청 세조는 효종 7년(1656) 4월 “과부로 저택에 살면서 부모형제와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며 귀국을 허락했다. 효종은 “귀국한 의순공주에게 평생 쌀을 지급하라”고 명했는데, 대간에서는 이개윤이 조정의 명령도 없이 딸의 귀환을 요청했다고 탄핵했다. 효종은 몇 차례 거부했으나 끝내 삭탈관작할 수밖에 없었다. 비운의 의순공주는 현종 3년(1662) 8월 사망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반정 초에 공신들이 회맹하면서 두 가지 밀약(密約)을 했는데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높여 임용하자’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국혼은 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것으로서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뜻이었다. 산림은 재야에서 독서하는 유학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쿠데타 명분이 부족했던 서인으로서는 이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효종 또한 산림의 지지가 중요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림이 소현세자 부인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은 ‘감사 김홍욱(金弘郁) 비문[金監司弘郁碣]’을 인용해 “효종이 즉위하자 민정중(閔鼎重)이 상소를 올려 강빈의 원통함을 호소했는데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그 전말을 조용히 말해 주면서 “‘강(姜)의 사악한 음모는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후에 감히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의논[不道論]으로 다스리겠다’면서 마침내 금지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효종은 재위 3년(1652) 5월 조강(朝講)을 마치고 신하들에게 “지난번 민정중이 역강(逆姜:강빈)의 일을 진소(陳疏)하였다. 민정중은 후진(後進)인데 어떻게 그때의 곡절을 알겠는가…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민정중은 강빈 사형(1646) 때 열네 살에 불과했다.
효종은 “역강이 많은 금백(金帛)을 뿌려 두루 당원(黨援)을 맺었으므로 이에 연연하여 잊지 못하는 자가 이런 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효종실록』 3년 5월 21일)고 공격하면서 “지금 역강을 구하려 하는 자들이 어찌 역적과 다르겠는가?”라고 퍼부었다. 『효종실록』은 이때 “여러 신하가 다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심양에서 9년간 함께 고생했던 형수를 역적으로 몰아야 하는 것이 효종의 처지였다. 그 역시 강빈과 아들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다. 강빈을 신원하면 그 아들도 신원시켜야 했고, 효종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시비(是非)나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산림도 사육신처럼 효종의 왕위를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추대하든지, 효종의 즉위를 인정하고 먼 후왕(後王)의 신원을 기다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효종의 즉위는 인정하면서 강빈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행으로 돌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나 『효종실록』의 사관(史官)이 이 기사 뒤에 “대개 임금의 뜻은 강씨의 옥사가 아무 내용이 없는 것으로 돌아가 선왕에게 누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고 덧붙인 것처럼 ‘강빈 비극’의 원흉이 인조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효종이 강빈 옥사 언급을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문제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 5년(1654) 재변이 잇따르자 내외에 구언(求言)했는데 황해도 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應旨上疏: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김홍욱은 효종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가장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이라고 간언하면서 “역적 조(趙:후궁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서로 모여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강빈이) 사사(賜死)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온 가문의 노소가 남김없이 주륙당했으니 아, 참혹합니다”(『효종실록』 5년 7월 7일)고 호소했다. 게다가 김홍욱은 “설령 그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원래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리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끝내 애매하게 죽여 영원히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면서 아들들의 문제까지 거론했다.
분개한 효종은 “상소를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면서 김홍욱을 압송해 친국했다.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이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말리자 효종은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감당할 것인데 경들이 무슨 상관인가?”라면서 형신(刑訊)을 감행했다. 김홍욱은 대신과 삼사(三司)를 부르며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효종실록』 5년 7월 13일)”고 울부짖었다.
김홍욱은 효종 5년(1654) 7월 장사(杖死)했는데 구언에 따른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므로 큰 반발이 일었다. 전 판서 조경(趙絅)은 “대신은 광보(匡輔:보필)하는 도리를 상실했고, 대간은 입을 다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며, 언로는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고 비판했고, 부사직(副司直) 정두경(鄭斗卿)도 “김홍욱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다”고 비판했다. 이런 항의에 대해 효종은 “국사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憂愛之誠)을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산림을 전부 적으로 돌리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효종과 산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왕은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고 생각하는 서인에게 언로를 막고 사대부를 죽인 효종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