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청군(淸軍) 본처들은 조선 여인에게 끓는 물을 끼얹고

화이트보스 2009. 5. 9. 18:43

청군(淸軍) 본처들은 조선 여인에게 끓는 물을 끼얹고
김기철 문화부기자 kichul@chosun.com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인데, 나는 지금 헤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려 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이미 북쪽으로 떠나 보냈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도를 잃은 나머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그리하여 난을 구하러 달여온 군사들로 하여금 전장의 원혼이 되게 했고.”

 

인조는 1637년 2월19일 교유문(敎諭文)을 내렸습니다. 왕조시대 군주가 낸 ‘대(對)국민 사과문’으로는 이례적일 만큼 처절한 내용입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고 신하의 예를 바친 직후였습니다. 이런 교유문을 내릴 수 밖에 없을 만큼, 정세는 급박했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인간 사냥’으로 잡아들인 수많은 조선 포로들이 심양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인조 장남인 소현세자도 그 해 2월 8일 인질로 심양에 끌려갔습니다. 찬 바람이 뼛속으로 스며드는 추운 날씨였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호송 책임자에게 아들을 온돌방에서 재워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소현세자는 이미 1월30일부터 2월8일까지 청군에 억류돼 노숙하다가 병을 얻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일국의 왕세자가 잠자리를 걱정할 만큼, 나라가 흔들거렸습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가 이번 주 펴낸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푸른 역사)는 전통시대 최대의 시련이라 할 만한 정묘·병자호란기를 세밀히 들여다보는 학술서입니다. 한 교수는 중국에서 명(明)에서 청(淸)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격변기에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으며 왕조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을 조(朝)·청(淸)관계와 조(朝)·일(日)관계, 나아가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한 교수는 이 두툼한 학술서를 소설 쓰듯 드라마틱하게 풀어갑니다.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무너졌다. 청군이 들이닥치자 참극이 시작됐다. 능욕을 피하려는 여인들이 바다에 몸을 던졌고,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낙엽처럼 떠다녔다. 처참한 장면이었다.’

 

‘1641년 11월 서울에 들어온 청나라 사신들이 자기 숙소인 태평관 부근으로 영의정 이하 조선 신료(臣僚)들을 집합시켰다. 그들 앞에는 의주부윤 황일호를 비롯한 사형수 11명이 무릎을 꿇었다. “명나라 선박과 밀통했다”는 죄목이었다. 목 잘린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청나라 통역 정명수는 자기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요구했다. 조선 신료들은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글을 줄이느라 표현을 약간 바꿨습니다만,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하는 문장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왕세자 인질의 치욕스런 역사 현장이었던 중국 심양의 조선관을 화폭에 옮긴 '심양관도'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형제관계’의 화약(和約)을 맺을 때, 마지못해 ‘개돼지’와 관계를 맺는다는 조선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지만 은혜를 베푼다는 후금(後金)의 인식은 병자호란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원래 청을 오랑캐라 멸시하던 조선 지식인들은 병자호란 직후 그들과 접촉하면서 조금씩 청의 실력을 인정하게 됐다는 거구요. 청으로 투항한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이 조선에 대해 만주족보다 더 가혹하게 굴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명나라가 인조반정을 찬탈이라 규정한 史書를 고치기 위해 후속 정권인 청을 상대로 교섭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은 청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는 겁니다.

 

병자호란 당시 끌려간 포로들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는 대목은 독자들의 눈길을 끌만합니다. 적게는 수만에서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포로 문제는 인조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할 만큼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청에 붙잡혀간 포로들은 심양에 도착할 때까지 추위와 배고픔을 겪었고, 도망치다가 살해 당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더 고통을 겪었습니다. 청나라 장병의 첩이 된 조선 여성들은 심양에 도착한 뒤, 본처들의 투기 대상이 됐습니다. 일부 청군 본처는 조선 여인에게 끓는 물을 뿌리거나, 고문을 가했습니다. 오죽했으면, 1637년 4월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성들을 계속 학대하는 여인은 남편이 죽으면 순사(殉死)시키겠다고 경고했을까요.

 

한 교수는 조선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호란을 피할 길은 없었는지 묻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최명길 등은 청과 결전을 벌이려는 의지가 있다면 인조가 앞장서고 조정이 압록강 변까지 나가 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패하더라도 피해 범위를 줄일 수 있고, 더 나은 조건으로 화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조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이런 판단이 청군이 깊숙이 남하하면서 서울 주변에서 엄청난 포로를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압록강변에서 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었는지는 다시 따져봐야겠지만, 적군을 도성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낸 것이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