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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선이 어떻게 16만 명의 전문 싸움꾼으로 구성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의병 봉기와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분전, 그리고 명군(明軍)의 참전이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리고 북상하자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어떻게 의병이 될 수 있었을까? 선조는 오직 압록강을 도강해 중국으로 건너가기에 부심했다. 재위 25년(1592) 5월 3일 윤두수가 “성상께서 요동으로 건너가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치첩(雉堞:성가퀴)을 지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선조는 “여기서 용천(龍川:압록강 부근)이 얼마나 남았는가?”라고 답했다. 선조는 망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의정 최흥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자 선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라고 답했다.
선조는 그해 5월 윤두수에게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라고도 물었다. 조선 백성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횡행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 지나는 곳마다 난민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약탈했다”고 전한다. 백성은 선조와 사대부에게 파산선고를 내렸다. 이런 상태에서 선조 25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가 이끄는 115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면서 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이 안전하게 됨으로써 일본군은 본토에서 직접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선조 26년(1593) 1월에는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조명(朝明)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전하는 바람에 기세가 곧 꺾였으나 전황은 달라졌고 선조도 그해 10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림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 입법이었다. 임란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령(宜寧) 유생 곽재우(郭再祐)였다.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도 곧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모두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들이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 정인홍은 3000명, 김면은 5000명으로 경상우도의 의병만 1만 명에 달했다. 의병을 일으킨 사림들은 먼저 사재를 털어 무기와 식량을 마련하고 의병소(義兵所) 또는 의진소(義陣所)·의승소(義勝所)라고도 불렸던 지휘부를 구성해 체계를 마련했다.
정인홍과 김면 휘하에서 활동했던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은 “온 경내(境內) 사자(士者)들이 모여 거사를 의논했다…경내 인민을 모두 계산해 그 요부(饒富:부유함) 정도에 따라 군자(軍資)를 내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나면서 의병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류성룡은 개혁 입법으로 의병 활동을 북돋웠다. 류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에서 “출신(出身: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양반(兩班)·서얼(庶孼)·향리(鄕吏)·공천(公賤)·사천(私賤)을 논할 것 없이 군사가 될 만한 장정은 사목(事目: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隊伍:군대)로 편성하라”고 명했는데 과거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도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켰다.
양반의 종군(從軍)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천인의 종군에는 대가가 따라야 했다. 그래서 만든 법이 면천법(免賤法)이다. 공사(公私) 천인(賤人)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良人)으로 속량시켜 주고 벼슬까지 주는 법이었다. 류성룡은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서장(乞抄擇精兵以爲後圖狀)’에서 “공사 천인·아전(衙前)·서자(庶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그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제 천인도 군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류성룡이 직접 작성한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伍冊)』에는 노비 출신이 하급 간부인 대총(隊總)까지 오른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우영장군자주부(右營將軍資主簿) 최준(崔浚) 휘하의 1기총 박덕남(朴德男) 산하의 3개 대총 중 2대총 송이(松伊)와 3대총 춘복(春卜)이 모두 종(奴) 출신이었다. 1대총 산하 11명 중 종 출신이 8명이었고, 2대총은 6명, 3대총은 8명이었다. 33명의 병사 중 종 출신이 무려 22명이었던 것이다. 노비가 대거 종군하게 된 것은 면천법 덕분이었다. 군공청(軍功廳)은 “공사 천인이 적의 머리를 1급(級) 참수(斬首:목을 벰)하면 면천,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국왕 호위 무사) 배속, 3급이면 허통(許通:벼슬 시키는 것),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4품관)을 제수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士族)과 다름없어야 마땅합니다”고 말했다. 노비 종군이 나쁠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도 지지했다. 실제로 조령의 의병이었던 천인 신충원(辛忠元)이 군공으로 수문장에 임명된 것처럼 신분 상승이 잇따랐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았다.
류성룡은 시험을 거쳐 뽑는 유급 상비군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만들었는데 노비가 대거 지원했다. 선조는 재위 27년 2월 “적이 물러간 다음 그 주인이 찾아간다면 훈련도감의 호령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적이 물러간 뒤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도 그러합니다…지금은 처첩(妻妾)까지도 항오(行伍:군대)에 편입해야 할 때입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노주(奴主)를 따지겠습니까”라고 분개했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東班:문관)의 정직(正職)에 붙여진 뒤에 그만두어야 하니 관작(官爵)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일본군 격퇴가 최우선 과제였던 선조는 류성룡의 의견대로 면천법을 고수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류성룡은 ‘시무를 아뢰는 차자’에서 “난리를 다스려 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비록 군사와 군량이 넉넉한 데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 함께 휴식할 뿐입니다”고 말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 개혁안이 훗날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렸던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거꾸로 많이 납부하고 부유한 사람이 적게 납부하던 공납(貢納)의 폐단을 조세 정의에 맞게 개혁한 법이 작미법이다. 부과 기준을 호(戶)에서 농지 소유의 다과(多寡)로 바꾸어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하게 한 법이다. 이는 조광조·이이 같은 개혁 정치가들의 단골 주장이었으나 양반 사대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던 법이었다.
작미법이 실시되면서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으니 위화도 회군 직후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개혁 입법이었다.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류성룡이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貢物作米議)’에서 감사(監司)·병사(兵使)·지방관·아전·부호가 모두 반대한다고 말한 것처럼 모든 벼슬아치가 반대했다. 심지어 이들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까지 댔는데 류성룡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갈파했다. 류성룡은 이런 개혁 입법들이 아니면 조선을 회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면천법으로 노비를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회생하고 있었다. 그러자 선조의 마음이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