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화이트보스 2009. 5. 18. 19:35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④ ‘요동 파천’ 논란

| 제109호 | 20090411 입력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 희생은커녕 군역(軍役)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육군박물관 소장>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외침(外侵)이 있을 경우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대기하다가 조정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 제도였다. 군사를 총 집결시켰다가 경장의 지휘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는 계책이지만 반대로 패전하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임란 6개월 전인 선조 24년(1591) 10월 좌의정 류성룡은 진관제(鎭管制)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류성룡은 진관제에 대해 “앞뒤가 서로 응하고 안팎이 서로 보완되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선조수정실록』 24년 10월 1일)”고 말했다. 진관제는 감사와 병사가 주재하는 주진(主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주관하는 거진(巨鎭), 고을 수령이 관할하는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몇 개의 제진이 거진을 중심으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체제다. 제승방략처럼 일거에 적을 섬멸하지는 못해도 한 진관이 무너져도 다른 진관이 방어하기에 일거에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경상감사 김수(金<775F>)가 ‘제승방략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다’고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모든 변화가 거부되는 상황에서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새벽 400여 척의 적선(賊船)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선조수정실록』은 “병사(兵使)가 ‘적의 배가 400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의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대략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입니다’라고 장계했고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고 전한다. 중종 때의 삼포왜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보다 조금 큰 국지전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00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000,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군 1만1000 명 등 도합 16만8000여 명의 대군이었다. 4월 14일 부산진성의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인근 다대포진도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전사하면서 함락되었고,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는 것)를 요구하는 고니시에게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면서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훈련하는 장면을 그린 수군조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그의 천거로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았다. 선조는 신립에게 보검(寶劍)을 하사하며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처단하라”고 격려했지만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군사도 없었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류성룡이 모집한 장사(壯士) 8000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렇게 급모한 군사들이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 고니시의 1군과 가토의 2군은 서울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지름길인 새재(鳥嶺)로 모여들었다.

조선에는 좋은 기회였으나 『선조실록』은 “제장(諸將)들이 모두 새재의 험준함을 근거로 적의 진격을 막자고 했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은 기병(騎兵)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들판을 전지(戰地)로 택한 것인데 4월 27일 탄금대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네 차례나 격퇴했으나 끝내 패전하고 자결했다. 충주에 무혈 입성한 고니시와 가토는 서울 진공 계획을 짰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자는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의 피란)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전한다. 패전 보고를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를 계획했다는 뜻이다.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우승지 신잡(申<78FC>)은 8순 노모가 있다면서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했고, 홍문관 수찬(修撰) 박동현(朴東賢)은 “전하의 연(輦)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라면서 통곡했다. 그러자 얼굴빛이 변한 선조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선조의 존재 자체가 임란 극복의 걸림돌이 되었다.

선조의 파천 발언이 알려지자 도성에는 큰 소동이 일었다. 선조는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진정시켰지만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모두가 도성 결전을 주창하는 가운데 영의정 이산해가 “예전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파천을 지지하고 나섰다. 『선조실록』은 “모두 웅성거리면서 (파천의) 죄를 산해에게 돌렸다”고 적고 있는데 선조는 이산해의 찬성을 근거로 파천을 결정했다. 대신과 승지들이 빨리 세자를 세워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망설이던 선조는 겨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데 찬성했다.

선조 일행은 4월 30일 새벽 비가 쏟아지는 궁궐을 나섰다. 그날 『선조실록』은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라고 전하고, 윤국형(尹國馨)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서 “저물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난리를 일으킨 군사들(亂卒)에게 빼앗겼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체제는 이미 붕괴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동향이었다. 류성룡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하다(記亂後事)’라는 글에서 “거가(車駕: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는데, 이 두 부서는 공사(公私) 노비들의 문서가 있는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고, 『임진록』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류성룡은 “(백성들이)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재산 관리하던 곳)에 들어가 금백(金帛)을 약탈했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도 불태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다 적이 이르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류성룡은 “처음 일본군이 입성했을 때는 서울 백성들이 다 도주했으나 오래지 않아 차차 돌아와 마을과 시장이 가득 차서 적(賊)과 서로 섞여서 장사했다”면서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賊帖)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해 준다. 백성들이 일본이 발행한 새 신분증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의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선조였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는 선조가 아침에 동파관(東坡館)에서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이모(李某: 이산해)야 류모(柳某: 류성룡)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마음속의 말을 다 말하라”고 울부짖었다고 전한다. 이는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행위이자 발언이었다. ‘어디’가 압록강 건너 요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승지 이항복은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명나라로 가서 호소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윤두수는 ‘지세가 험한 함경도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으나 선조의 뜻은 곧바로 요동으로 도주하는 데 있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朝鮮非我有也: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라며 월경(越境)을 반대했다. 선조가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말했으나 류성룡은 거듭 안 된다고 반대했다. 내부란 명나라로 도주해 붙겠다는 뜻이었다. 백성은 도성에 불을 지르고 국왕은 도주에 가장 큰 뜻이 있는 조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밑바닥에서 회생의 싹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