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 미군이 대여한 보잉 727기를 타고 사이공 인근 탄손누트 공항에 내리자 후텁지근한 열기가 얼굴에 확 끼쳐 왔다.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어느새 따가운 햇살이 시야를 시리게 했다.
주월사 인사참모부가 제공한 세단을 타고 사이공 시내의 번화가에 있는 주월사령부로 이동했다. 거리는 전쟁 중인 나라답지 않게 북적거리고 화려하고 행인들의 모습에서도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이 하나의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곧 나와 세 번째 인연을 맺은 인사참모 최창주 대령과 하나하나 업무 인수인계에 들어갔다. 그는 산적한 문제점부터 설명했다.
“베트남에는 육군대학 교리대로 되는 것이 없소. 그중 인사참모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본국의 VIP 접대요. 우선 방문자 수가 너무나 많다는 거요. 각 부처 장관, 국회의원, 국영 기업체 사장, 각 사회 단체장, 예술인 대표, 언론인 대표 등 하루에도 10건 이상 처리해야 할 때도 있소. 우리 군을 위문하러 오는데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할 수도 없고….”
다음으로 사상자 처리에 원성이 높다는 점이다. 아들이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에는 선글라스에 라디오를 들고, 시계를 차고, 카메라를 메고, 다른 손에는 녹음기를 들고 폼을 잡고 있는데 배달돼 온 우편물에는 아들의 유골 상자와 피묻은 군복만 들어 있을 뿐 그런 유품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문제만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남의 물품을 빌려 폼나게 사진을 찍어 고국의 부모님에게 과시하듯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 베트남은 위험한 곳이 아니며 이처럼 풍족하게 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뜻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 그렇다 하더라도 현지 사정을 모르는 고국의 부모님들이 자식을 잃은 슬픔에 더해 유품까지 제대로 오지 않았다면 그 상심이 얼마나 크랴 하는 아픔이 전해 왔던 것이다.
당시 파월 장병들에게는 행복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즉, “졸병들은 지겨운 고기만 주고 장교놈들은 채소만 먹는다”는 불평들이다. 고국에서는 1년에 돼지고기 한 점 먹으려면 조상 제사 때나 명절 때뿐인데 이곳 베트남에서는 날마다 손바닥만한 비프스테이크가 덩어리째 나온다. 처음에 한국군 병사들은 걸신들린 듯 스테이크를 먹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기가 지겨워져 이제는 채소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파월 병사들은 잘 먹고 있었지만 전선은 너무나 불안정해 인명 손실이 많았다. 그래서 아무리 잘 먹고 좋은 물건들을 사 놓았다고 해도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인명 손실이 전투시보다 비전투시에 더 많다는 점이다. 총기 오발·교통사고·화재사고, 그리고 폭력 사건으로 인한 안전사고였다.
고국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해 못 먹고 못 입는 병영 생활을 하는데 갑자기 풍족해지니 병사들이 풀어지고 늘어진 결과였다. 바로 기강 해이였다. 해외 주둔 경험이 처음이므로 어떤 기준이나 지침이 채 마련되지 못한 데서 오는 혼란이기도 했다.
파월 기술자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이들은 부두의 기중기 운전, 건설과 토목, 화물 수송 등의 기술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상당수는 ‘낮에는 사기 결혼 기술자고 밤에는 도망가는 기술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순진한 베트남 처녀와 사랑을 맺고는 근로 계약이 끝나거나 다른 곳으로 전속갈 때 줄행랑을 놓든지 벌써 다른 처녀를 손대고 있는 것이다. 라이따이한(한국 - 베트남 혼혈)이 양산된 것도 이런 결과였다.
최창주 대령은 이런 문제로 주월사 인사참모의 역할이 골치가 아프다고 걱정 반 격려 반으로 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최대령, 무엇보다 허위 전과 보고를 잘 파악하시오. 작전에서 적 피해는 심대하고 아군 피해는 미미하다는 허위성 보고가 심각하오. 그리고 우리 기술자를 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통보해 왔는데 이것도 해결해야 할 사안이오.”
나는 무엇보다 군 사기를 위해 행동 수칙과 강령을 제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