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화 상태가 좋지 않아 되물었다.
“뭐가 떨어졌다고요?”
“주월사령부 군 수송기가 악천후로 떨어져 장군 3명이 추락사했다. 귀관은 본국에 남아 장례 절차를 밟을 것!”
그곳도 다급했던지 여기까지 이어지고 전화가 찰칵 끊겼다.
맹호부대의 군용 수송기가 산중 밀림에서 작전을 수행하다 기상 악화로 추락해 작전참모 김강섭(육사10기), 군수참모 김정환(육사7기), 부관참모 안도열(현지 임관) 준장과 조종사 2명 등 5명이 추락사한 것이다.
세 장군은 사고 며칠 전 장군 진급 발표를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그래서 더욱 의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했다.
윤성민 참모장으로부터 전원 참사의 비보를 접한 나는 의전 실무를 위해 본국에 남아 유해 안치와 국립묘지 안장 등 사후 처리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이세호 주월사령관 부인과 내 아내까지 동원돼 유족 위로에 나서고 나는 KBS-TV에 출연, 순직 장군들의 추모 방송(장군들의 생전의 활약상과 약력 소개)을 했다. 보도 관제도 풀고 기자 회견을 열어 순직 상황을 브리핑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족들을 위로하는 일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장군이 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던 자녀들이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슬피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정말 못 견딜 일이었다.
기상에 대한 대비는 조종사가 한다. 그러나 세 장군의 의욕이 조종사에게 헬기를 몰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베트남의 기상 조건은 매우 불확실해 웬만하면 헬기가 뜨지 않는데 이들은 기상 악화도 무릅쓰고 적진의 밀림을 정찰하다 갑작스러운 폭풍우에 말려 산 중턱에 추락해 버린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부대로 귀대하자 모두 충격에 싸여 있었다. 하긴 장군 세 사람이 한꺼번에 죽었으니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령부의 분위기가 계속 침울하게 가라앉은 것이 걱정됐다.
나는 이사령관을 면담하고 비전투 손실을 과감히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미군은 마약 등으로 비전투 손실이 많은데 비해 우리는 경험 부족과 과잉 용맹으로 역시 비전투 손실이 많았다. 교전 상태가 아닌 손실은 주로 오발·화재·경계 노출·교통사고·화재사고로 빚어지고 있었다. 바로 전투 훈련이 부족하면 생기는 사고였다.
훈련 정도가 낮으면 긴장감이 떨어지게 돼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전장에서 비전투 손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팔팔하게 뛰던 활어 같은 장병들이 사소한 사고로 허망한 주검이 된 것을 볼 때 비통함보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전투 군기 확립이었다. 바로 강훈련 실시였다. 내 군대 경험 36년 10개월 20일 동안 가진 군사 철학이 있다면 ‘강훈련에 사고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군의 파월 9년간 전투 손실은 3844명, 비전투 손실은 3788명이다. 수치가 비슷하지만 사실은 본인의 명예나 유가족을 고려해(연금 지급이 다른 것 등) 전투 손실로 돌려놓아서 그렇지 비전투 손실이 훨씬 많은 실정이었다.
특히 파월 초기 시행착오와 미국식 군대 운영을 따른 결과 비전투 손실이 많았다. 매월 평균 35명 정도가 사소한 사고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강훈련 프로그램을 별도로 편성했다. 그 결과 비전투 손실이 완연히 줄어들었다. 사실 그것은 전투 손실도 최소화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평화시일수록 병사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나 육체·정신 건강을 위해 매서운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사람이다.
이런 강훈련의 결과 한국군은 베트남군을 비롯, 미국·호주·뉴질랜드·태국·필리핀·대만 등 8개 군 중 신뢰도·용맹성·작전 수행 능력·단결력·전우애·예절 등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해 주월 미군의 정보 보고에 늘 올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