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사령부 인사참모장 스미스 장군의 입에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얘기를 했다. 미군사령부는 한국군의 우수성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정작 한국군에 대한 훈장 수여는 인색하다. 한국군이 미군에게 주는 훈장의 4분의 1도 안 되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한국군의 규율은 엄격하다. 그래서 마약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미군과 같은 무기와 처우가 주어졌다면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됐을 것이다. 연합군 8개 군 중에서 한국군이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지만 전투 능력이 가장 뛰어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도 병사나 지휘관 사기를 고려한 미군사령부의 훈장이 너무 빈약하다.”
미군 병사의 전쟁수당이 한국의 3성 장군 수당(350달러)과 비슷했으니 다른 비교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작전 수행 능력이나 대민 사업도 그들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 그런데도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처우가 이렇게 차이가 난 것이다. 훈장 수여와 처우, 피복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불평등한 조건이다. 그중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훈장 수여 통계를 제시했다. 스미스 장군이 수행하던 대령을 부르더니 물었다.
“한국군에 주는 훈장 수여 실태를 알고 있는가.”
실무 담당인 대령의 답변이 곧바로 나왔다.
“한국군은 사단장급 이상만 신청해 왔다. 그 이하 계급은 신청한 사실이 없다.”
신청하지 않았는데도 훈장을 수여할 리는 만무한 일. 이는 철저히 한국군사령부의 잘못인 셈이었다. 한국군은 훈장 수여를 부대별로 배당했다. 훈격별로 각급 부대에 배당했으니 한마디로 불합리한 제도였다. 그것도 대령급 이상에만 국한했다.
나는 곧바로 미국식 훈장 추천 입증 제도를 도입했다. 신청이 없어 훈장을 안 줬다는데 제도를 안 이상 적극 활용해야 했다. 계급별 차이를 두지 않고 임무 위주로 훈장 수여 균형을 잡아 나갔다. 이때부터 미군의 명예대훈장·은성무공훈장의 뒤를 잇는 명예로운 십자훈장을 우리 군이 받는 사례도 생겨났다.
초대 채명신 사령관 때 시작된 것이지만 뒤를 이은 이세호 사령관도 귀국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다. 병사들이 귀국할 때는 물품을 많이 가져가도록 대형 귀국 상자를 허용했다. 명분은 사물을 담아 가도록 한 것이지만 베트남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이쑤시개 하나라도 더 가져가라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사과 상자 15개 정도가 들어가는 높이 180cm, 4각의 1면이 60cm 되는 상자, 위관급 이상은 그 배의 상자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러자 문제가 생겼다. 암시장의 물품이 동나 버린 것이다. 면세품인 미군용 물품은 물론 카메라·TV 수상기·설탕·담배, 심지어 탄피까지 쓸어 가고 있었다. 탄피는 국내에서 유기그릇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 때문에 값이 좋았다. 그중 탄피는 미군에 반납하게 돼 있었으므로 말썽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령관은 마약이나 금괴와 같은 절대 금지 품목 이외에는 통관 절차를 너그럽게 해 주라는 특별 지시를 내려 귀국병들은 저마다 ‘희망’을 귀국 상자에 가득 담아 간 셈이다.
기아에 허덕이던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 베트남 파병은 우리 조국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계기였다. 미군 병사들은 월급을 받아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써 버린 데 비해 우리 병사들은 그들보다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전쟁수당을 받지만 그것을 모아 귀국 때는 돈되는 것을 하나 둘 모아 가져가는 것이었다.
내무반에 귀국 병사가 생기면 동료 전우들이 나서서 밤새도록 ‘귀국 상자’를 만들어 주느라 톱질·망치질로 요란했다. 용맹스럽고 전우애 깊고, 스스로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 신이 우리 민족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사실 이는 미군 장교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육군 진급 심사 위원으로 위촉돼 잠시 본국에 들어가 있을 때(69년 10월)였다. 윤성민 주월사 참모장으로부터 긴급 호출 전화가 왔다.
“헬리콥터가 추락해 장군 세 명이 순직했다. 급히 귀대하라!”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