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2월 나는 강릉 제10전투비행전대 전대장으로 임명됐다. 25대의 F - 51 전투기와 30여 명의 전투 조종사를 이끄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53년 1월1일 강릉 기지를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받으면서 한국 공군 최초로 한국 지휘관이 비행기지사령관(Base Commander)이 됐다. 그래서 전투전대장의 책임은 더욱 막중했다. 명령받은 목표물을 100% 명중, 파괴시켜야 하고 아군은 무사 귀환해야 한다. 일출 전 작전 브리핑 때와 임무를 완수했을 때도 여일(如一)해야 한다.
동해안의 출격과 귀환 항로는 금강산줄기 상공을 통과한다. 이때 본 금강산의 가을 단풍과 겨울 골짜기는 평생 잊을 수 없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산은 한마디로 백미다. 그러나 원산·간성과 경원선의 철도·교량·터널, 적의 집결지와 물자 집적소, 구축된 진지 등은 우리 조종사들의 표적이었다. 신고산의 계곡에 은신해 있는 인민군은 흡사 솜이불에 이 박히듯 박혀 있어 무더기로 폭탄 투하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적의 저항은 집요했고 끈질겼다.
53년 2월10일께. 육군1군단장인 이형근 중장이 급히 만나자며 부관을 보내왔다. 강릉 북쪽 1군단장실로 달려가니 이군단장이 정중히 맞으며 용건을 말했다.
“동해안 351고지의 전투가 치열하오. 하루 저녁에도 서로 뺏고 빼앗기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적이 터널을 파 들어오고 있소. 이 터널을 폭파해야 하겠는데 공군의 협력이 필요하오.”
351고지는 점령하기만 하면 오늘의 통일전망대 북쪽과 금강산 이남의 대평원을 한 손에 넣을 수 있는 대단히 전략적인 곳이었다. 적도 다른 것은 몰라도 351고지만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엄청난 화기와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일 피아간 혈전을 벌여 ‘피의 능선’으로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현재는 휴전선 북방한계선에 위치해 있는 351고지. 피아 쌍방이 벌써 5, 6차례나 빼앗고 뺏긴 전략적인 요충지. 그래서 적은 터널을 파고 들어와 우리의 뒤통수를 칠 속셈이었다. 동해에서 함포 사격으로 터널을 공격하지만 각도가 달라 산허리만 때릴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제10전투비행전대에 폭격을 요청해 왔다.
미 고문단장으로 파견된 스틸웰(전 유엔군사령관) 대령이 한국 공군의 폭격이라야 터널을 부술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이군단장이 나를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부터 파 들어오는 터널을 파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남쪽의 아군 진지에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은 공격의 룰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난색을 표명했다.
동석한 스틸웰 고문단장이 “지형상 전투기로 때려야 한다. 공군이 육군을 보호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한국 공군이나 미국 공군의 룰은 마찬가지였다. 미 공군 역시 난색을 표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이 중대하다며 전투기 폭격을 강력히 요청했다.
“귀대해서 참모들과 연구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귀대해 참모 회의를 소집했다. 대대장인 김금성·이기협 소령, 작전과장 옥만호 소령이 내 말을 듣고 모두 반대했다. 적 진지가 아군 부대와 능선 하나 사이로 너무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이틀 후 나는 김대대장을 별도로 불렀다. 그는 출격 198회를 기록한 베테랑 전투 조종사였으며 내가 가장 믿는 전우였다.
“대대장 생각은 어떤가.”
“폭탄이 오버(over)하면 아군 피해가 막심합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정확하게 떨어뜨릴 생각을 해 봐.”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네와 나 단둘이 몰래 비행기를 몰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전투기를 각자 몰고 북쪽 멀리 날아가 남으로 내달리며 현지 지형을 정찰했다. 남하하면서 내가 그에게 무전을 쳤다.
“어떤가.”
“신중히 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OK, Over!”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