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0월30일 전투비행단 제10전투전대가 강릉 비행장으로 전진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 비행기가 적진을 공격하다 보면 적의 대공포를 맞고 격추되는 일이 더러 발생했다. 이때 비행기를 잃는 것은 물론 귀중한 인명 손실을 보게 된다.
특히 강릉은 6·25전쟁 중 최전방 기지였으며 F - 51기로 무장한 우리 제10전투비행전대는 동해안 전선의 1군단을 근접 지원하고 38도선 너머 인민군 2군단 후방의 주 보급로 차단 폭격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아군 기가 적의 대공포에 격추되는 일이 생겼다.
비행기가 격추되더라도 전투 조종사가 낙하산을 타고 비상 탈출, 적진에 떨어지거나 불시착해 생존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생존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비행기가 격추되면 조종사는 거의 구출하지 못했다. 생존해 있을지라도 구할 방법이 없어 포기하다 보니 적진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6·25전쟁에서는 조종사를 구출하는 사례가 많았다.
조종사가 비상 탈출해 적진 깊숙한 곳에 은신해 있을 때 아군 기가 지체 없이 출동, 조종사가 격추된 지점 상공을 위협 비행하며 적 지상군의 접근을 차단한다. 한편 가장 가까운 부대의 헬리콥터를 동원, 조종사 구출 작전을 편다.
즉, 헬리콥터가 조종사를 신속히 구출하고 안전하게 이착륙할 수 있도록 이를 확보·수색·구출하는 데 6·25전쟁에서는 격추된 조종사 70~80%를 구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100% 구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성공한 작전인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낙오자가 생기거나 부상 조종사를 구해 내지 못했을 때 오는 아군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혹 적에게 붙잡히면 인간인 이상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군사 기밀을 불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살아 있는 전우를 적진에 떨어뜨리고 편히 잠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진에 떨어진 조종사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조종사가 자신의 소재를 알리는 신호나 기호가 필요했다. 휴대하기 쉬운 물건으로 적에게 노출되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아군 수색대원에게 소재를 알리는 것. 나는 생각 끝에 유색 천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환 전대장에게 이를 제안했다.
“내가 보기로는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출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빨간 마후라?’ 중공군놈들이 좋아하는 색깔 아닌가. 차라리 흰 천이 낫지 않아?”
“흰 천은 색깔이 약하죠. 많은 사람이 흰 옷을 입고 다니니까 구분이 잘 안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빨간 마후라’가 나을 것 같습니다.”
김전대장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실험 결과 빨간 천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럼 빨간 천으로 하자”고 결정했다.
나는 다음 날 강릉 시내로 나가 붉은 인조 견사를 두 필 사 왔다. 그리고 대충 가로 30cm, 세로 60cm로 잘라 ‘빨간 마후라’를 100여 장 만들었다. 조종사들이 출격할 때마다 이것을 목에 두르고 나가도록 했다. 지원 병과는 제외하고 전투 조종사에게만 특별히 착용토록 한 것이다.
이 결과 적지에서 격추된 전투 조종사가 부상 당한 몸으로 구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군 헬기가 침투해 들어가 ‘빨간 마후라’를 흔드는 수신호를 따라 극적으로 구출한 경우가 생겨났다. ‘빨간 마후라’의 효용성은 당장 나타났고 전투 조종사들 역시 부적처럼 착용하고 출격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이는 전투 조종사들에게 뜨거운 정열과 불굴의 사명감, 필승의 신념을 고취하는 정체성의 표상이 됐으며 나중에는 전투 조종사 권위의 상징이 됐다.
막강 공군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특히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른 전투 조종사들이 멋있게 보여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당시 전투 조종사들은 전쟁으로 인한 내일의 불확실성과 청춘의 격정, 때로 낭만을 즐기고자 강릉 시내로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이때 심심찮게 청춘 남녀가 열애에 빠지고 출격 나간 조종사가 끝내 돌아오지 못할 경우 비련의 여성이 생겨났다.
이런 사연들이 퍼져 대중가요로 소개되더니 전쟁이 끝난 얼마 후에는 ‘빨간 마후라’를 소재로 영화화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내가 공군참모차장 때(1962년 가을)의 일로 어느 날 극작가 한운사씨가 나를 찾아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