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95>제3話 빨간 마후라 -45-공군 첫 단독 작전

화이트보스 2009. 5. 23. 15:48

<295>제3話 빨간 마후라 -45-공군 첫 단독 작전

김정렬 참모총장이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저간의 사정을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극형을 면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듣기까지 했다.

1951년 9월 갑자기 미5공군사령부로부터 ORI(Operational Readiness Inspection : 전투 능력 점검)를 실시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그것은 꽤 감정적인 대응으로 보였다. 6146부대 윌슨 대위의 요청(김영환 전대장과 나의 처벌)이 유야무야된 데 대한 불쾌감과 우리 비행단에 대한 불신이 이런 검열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됐다.

아이젝슨 중령을 단장으로 한 12명의 미 검열단은 사천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앞으로 열흘간 작전·정보·정비·무장·통신·보급은 물론 실제의 비행 폭격과 로켓포 발사·편대비행·항법귀환·결과 보고(Debriefing)를 검열한다. 출격 편대에는 미 검열관(조종사) 1명이 끼어 비행 사격과 폭격을 검열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차피 거쳐야 할 관문이라면 제대로 해 보자며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 날부터 매일 명령이 떨어지는데 작전참모인 내가 이를 받아 목표물과 비행편대 구성, 무장 폭탄과 기총 소사 등 작전 계획을 짜 김전대장에게 전달했다. 이때 F - 51기도 더 지원을 받아 비행단은 2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편대 중 4번기에는 미 검열단이 탑승하고 우리의 공격 과정을 낱낱이 살폈다. 이륙과 공중에서의 합류, 목표 지점 비행, 폭탄 투하, 로켓포 발사, 기총 소사를 마치고 다시 편대를 이뤄 귀대하기까지, 그리고 이를 편대장 - 작전처 - 검열단에 차례로 브리핑하는 과정을 체크했다. 이것이 무려 여덟 차례나 반복됐다.

마지막 관문으로 황해도 해주 인근 농촌의 조그만 교량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개 편대를 편성, 출격시키고 나 역시 그 일원으로 F - 51기를 몰고 나갔다. 이것 역시 완벽히 이행했다.

이윽고 열흘간의 검열 결과가 나왔다. “ROKAF is capable to perform tactical air combat operations except aireal combat.” (한국 공군은 적과의 공중전을 제외하고 능숙한 공중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 같은 총평은 우리 공군 창군 사상 자랑스러운 쾌거였다. 스스로 단독 비행·단독 작전을 펼 수 있는 역량이 주어진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작전에 120여 회 출격하는 등 그동안 착실히 전과를 쌓아 온 결과물이었다.

전투기 보유, 조종사 확보, 장비·무장 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벽히 처리해낸 것은 공군의 단결심과 애국충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6146부대의 간섭 없이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기뻤다.

51년 10월1일. 사천 전투비행단(제1전투비행단) 밑에 제10전투비행전대가 편성되고 이 비행전대는 강릉 비행장으로 전진했다.

단독 전투 비행장 확보. 이것 역시 우리 공군으로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제10전투비행전대장은 김영환 대령이 맡고 작전처장은 나(중령), 대대장은 박희동 소령이 맡았다. 전투기는 3개 편대(12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전투·기지·정비·의무대대를 새로 편성했다.

그런데 11월15일 미 공군대 입교 명령이 떨어졌다. 입교생 10명 중 나와 김영환·김창규는 6개월 코스의 공군 지휘 참모대학에 입교했고 나머지 일반·행정·정비 장교 7명은 3개월 코스의 교육 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 중 플로리다 야전훈련장에서 펼쳐진 화력 전시장(전폭기 등 최신 기종)과 화력 시범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본 일본 공군력은 한마디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화력 전시(시범)는 세계 최강답게 초음속 전투기, 최신예 첨단 무기, 전술·전략이 통합적으로 전개됐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편제와 부대 지휘·운영도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었다. 특히 권한 이양 시스템과 부대 편성·작전·지휘·통솔력이 인상적이어서 나는 그대로 베껴 왔다.

52년 7월 귀국해 사천 전투비행단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미국에서 본 화력 전시를 10월1일 공군 창설 기념일을 기념, 재현해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내가 처음으로 창안한 ‘에어쇼’라는 이름의 계획서를 본부에 올렸지만 한 달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에어쇼는 날짜만 받아 놓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 아래 고도의 훈련을 펴야 했다. 하지만 개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 데도 가부(可否)의 통보가 없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