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남침으로 국군은 다시 무작정 후퇴 길에 나섰다. 우리 공군은 미숙한 전투 훈련을 보완할 목적으로 1950년 12월 말 제주 비행장으로 후퇴했다. 미 고문단 6146부대와 함께 떠나려 했지만 고문단은 전투하기 위해 대전에 남았다.
제주도는 기후 변화가 심했다. 비행 범위도 좁고 사격장도 없었으며 훈련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다시 비행장을 옮길 것을 고려해 51년 3월 말 공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갔다.
그런데 육군보병사단장 출신이 공군작전국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사단 병력이 전투 중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하고 자신은 도주했다가 군법 회의에 회부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공군대령 계급을 달고 작전국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공군 상황을 몰라 충분한 협의를 하지 못했다. 이상한 생각을 하며 귀대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오른쪽 가야산 위를 나는데 질펀하게 뻗은 비행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의 활주로가 일품이었다. 일제 때 일본 해군이 닦아 놓은 비행장으로 활주로가 길게 포장돼 뻗어 있고 유도로도 잘 닦여 있었다. 바로 사천 비행장이었다.
나는 뒷좌석에 탄 박희동 대위에게 밑을 내려다보라고 엄지손가락을 대지 쪽으로 가리켰다. 박대위가 밑을 내려다보더니 환히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OK 사인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내린다는 신호를 하고 곧바로 착륙했다.
느닷없이 T - 6 훈련기가 비행장에 내리자 활주로를 지키던 병사들이 쫓아왔다. 낯익은 오점석 대위가 병사들을 인솔하고 다가왔다. 그는 비행장 정찰대장이었다.
“비행장 구경 좀 할까?”
내가 말하자 벌써 오대위는 눈치를 채고 “비행장은 그만이지. 대한민국에서 제일이야”하고 자랑했다. 지프로 비행장을 돌아보고 나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비행기에 오르려 하자 오대위가 “여기가 내 고향이야. 해도 떨어졌는데 진주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지”하며 꼬드겼다.
박대위도 자고 가자며 주저앉아 하룻밤 쉬고 다음 날 제주로 날았다. 장덕창 비행단장에게 “비행장으로는 사천이 그만이다”라고 보고하자 그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사람아, 거기는 깡촌 아닌가?” “비행장 옆에 진주가 있습니다. 좋은 곳입니다. 한 번 출장 갔다 오시죠.”
가기만 하면 오대위가 구워삶을 것은 분명했다.“좋아, 비행기 준비해.”
다음 날 장단장은 김영환 부단장과 함께 사천으로 날아갔다. 당일 오겠다던 장단장은 그러나 해가 떨어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대위가 진주 요릿집으로 모셨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음 날 귀대한 장단장은 사천 비행장으로 옮길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진주 약발이 먹힌 것이었다.
51년 6월 말 비행단은 사천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며칠 후 산청 경찰서장이 비행단을 찾아왔다. 지리산에서 인민군 토벌에 나서고 있지만 경찰 병력만으로는 어려우니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우리 역시 사격장이 필요해 지리산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지리산에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된 인민군 주력 부대인 남부군 사단 병력이 들어와 있었다. 이현상 남부군사령관 지휘 아래 유격 활동을 벌이며 저항하고 있었다.
7월23일 진주 경찰서에서 공군과 경찰이 합동 작전 회의를 열었다. 남부군 병력이 얼마이고 본부와 주 활동 루트가 어디며 병력 수준과 양민 약탈 사례를 점검했다.
그런 자료를 토대로 정찰을 나가는데 지리산 북쪽 남원 인근의 칠보 발전소에서 전력을 끌어다 쓰는 흔적이 발견됐다. 북한과 무전 교신을 하기 위해서도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됐다.
아니나 다를까 군용 트럭 5~6대, 스리쿼터 3대, 지프 2대, 그리고 앰뷸런스 1대가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목격됐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숲속에 숨어 있거나 굴속에 잠복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남부군의 주력 이현상 부대였던 것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