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90>제3話 빨간 마후라 -40-평양 미림 비행장 점령

화이트보스 2009. 5. 23. 15:43
<290>제3話 빨간 마후라 -40-평양 미림 비행장 점령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하자 우리는 1950년 10월20일 평양 외곽의 미림 비행장을 재빨리 점령했다. 미림 비행장은 바로 전날까지 북한 공군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작전참모(소령)인 나는 기지·정비·의무전대 등 지상 부대를 인솔해 육로로 38선을 넘었다. 김신(중령) 기지전대장과 함께 지프를 타고 가는데 개성 북쪽에서 김중령이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형, 왜 그래요?”하고 내가 묻자 김중령은 “저걸 보라”면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세단 승용차를 가리켰다. “저 차가 경교장 차야. 아버님(김구 선생) 전용차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차를 몇 번 탄 기억이 났다. 남북 협상을 추진하다 쓰러진 주인 잃은 차를 전선에서 만나자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재빨리 지프에서 내려 세단 승용차를 세웠다.

“이 차를 어디로 가지고 가는가.” 차는 육군 운전병이 몰고 있었다.

“인민군놈들이 징발해 간 것을 평양에서 찾아 오는 길입니다. 서울로 보내라고 해서 가져오는 중입니다.”

“이 차 임자는 김구 선생님이시다. 이분이 김구 선생님의 아드님이시고.”

나는 지프에 앉아 있는 김중령을 가리켰다. 운전병이 차에서 내리더니 경례를 붙였다. “영광입니다. 두고 갈까요?”

그러자 김중령이 말했다. “아니다. 서울로 보내라.”

그러나 서울로 보내진 세단 승용차는 그 후 영영 찾지 못했다. 전쟁 중에는 사사로운 것을 챙길 수가 없는 것이다.

미림 비행장은 대동강변에 있는 잘 닦인 비행장으로 평양의 두 개 비행장 중 하나였다. 거기에 인민군 전투기는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박살이 났거나 어디론가 도망간 뒤였다. 하기는 미 5공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 공군은 8월1일 흥남에 전투기·폭격기 500대가 출격해 도시를 초토화했고 같은 날 청진에는 B - 29 60대, 9월16일 원산에는 80대가 출격해 파괴했다.

전투기는 국내의 대구·김해·부산 수영·포항 비행장에서, 국외는 일본의 이타스케를 비롯해 3개 기지, 오키나와 2개 기지, 괌·필리핀 클라크 기지 등에서 출격했다. 또 동해안·남해안에 대기 중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미 해군기와 해병대 항공기들까지 하루 1000소티(출격)를 초과했으니 며칠 만에 북한은 쑥대밭이 된 셈이었다.

적의 비행장과 지상군 집결지, 보급집적소, 통신지휘소, 후방 원조 병력의 운송 대열과 연안 선박이 완전히 사라졌다.

출격 수치도 어마어마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당시 한국 공군의 F - 51 전투기 1개 편대(4대)는 적의 지상 병력 1개 중대 산개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1개 편대에는 폭탄 8발(250파운드), 로켓포 24발, 기관총 7440발을 장착할 수 있었다.

평양은 50년 10월 1차 폭격에서 거의 파괴됐고 52년 7월 650대의 폭격기·전투기가 하루 1300여 출격해 완전 쓸어 버렸다. 이때 우리 공군도 작은 규모(1개 편대)지만 지정된 목표를 파괴했다.

적의 전선은 붕괴됐고 우리는 강계·혜산·압록강까지 올라갔다. 통일은 눈앞에 와 있는 듯했다.

적의 몇 대 안 남은 비행기는 만주로 도망가 북한에서는 전투기를 단 한 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림 비행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50년 11월 중순. 박범집 공군참모차장이 고향 함흥을 간다고 나섰다. 고향을 해방시켰으니 개선장군처럼 가는 것이었다. 그가 직접 T - 6 훈련기를 몰고 뒷좌석에는 수행하던 서한호 작전국장이 탔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