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296>제3話 빨간 마후라 -46-공군 위상 새로이 한 에어쇼

화이트보스 2009. 5. 23. 15:48

<296>제3話 빨간 마후라 -46-공군 위상 새로이 한 에어쇼

1952년 9월1일 진해에서 전 공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각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 여러 가지 의제가 상정됐지만 우리는 화력 전시(에어쇼) 안건에 큰 비중을 뒀다. 그래서 내가 차트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브리핑했다.

“화력 전시는 대통령 각하, 유엔군사령관, 국무위원, 각군 참모총장, 외교 사절 등을 모시고 우리 공군의 위상과 공군력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본부에서 예산 지원에 관한 통보가 아직껏 없습니다.”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공군본부는 항공 전투 경험이 적은 참모들로 구성돼 있어 화력 전시에 관한 인식이 별로 없었다. 조종사 출신도 참모총장과 차장 정도이고 실무진은 거의 비조종사 출신들로 짜여져 있었다. 숫자도 부족했지만 전쟁 중이어서 본부보다 일선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나가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내가 거듭 “공군의 가치와 위상을 올릴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때 경리국장인 한춘석 소령이 불쑥 나섰다.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듣던 김영환 부단장이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고. 그래, 밤에 술 먹으러 가는 돈은 있어도 공군의 전투력을 높일 예산은 없단 말이야?”

김부단장의 호통에 한소령이 목을 움츠렸다. 하긴 그들은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말발이 설리가 만무한 것이다.

다행히 지휘관 회의의 해프닝이 있은 뒤 곧바로 예산이 집행됐다. 나는 화력 전시 계획을 추진하면서 미 5공군과 교섭했다. F - 51·F - 80·F - 84·F - 86기와 B - 25기(B - 29는 대형이어서 제외) 등 40여 대가 참가토록 요청했다.

우리 공군은 F - 51과 T - 6기 20여 대를 동원했다. 사천 비행장 활주로 너머 산에 폭격 목표물을 설치하고 폭탄 투하, 로켓포 발사, 캘리버의 기총 소사 등 화력 발사를 계획했다.

이윽고 10월1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각 기지에서 날아온 비행 편대들이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정해진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고 로켓포 발사·기총 소사를 감행했다. 그동안 연습한 대로 완벽한 화력 시범이 펼쳐졌다.

활주로 안쪽 본부 언덕에 설치한 관람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 각부 장관, 3군 참모총장, 유엔군사령관, 미8군사령관, 외교 사절 등 150여 명의 내빈과 많은 민간인 관람객이 화력 전시의 장관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대통령은 비행기의 묘기와 폭탄 투하를 보면서 파안대소하며 박수를 보냈다.

이대통령은 화력 전시를 성공리에 마친 김부단장, 장성환·김신 조종사와 작전참모인 나를 세워 놓고 “이제는 안심하고 잘 수 있네” 하며 행사 지휘부에 악수를 청하며 격려했다.

사실 대통령조차 우리 공군에 대한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다. 미 고문단에 의해 폭격이 이루어지고 우리 공군은 없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화력 전시를 참관하면서 공군의 실력이 미군과 다를 바 없고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어떤 비행기라도 주면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킨 것이다.

화력 전시는 내가 미 공군대학 유학에서 얻은 아이디어지만 강릉 전투전대에서 익힌 단독 작전·전투의 영향이 컸다. 미 5공군의 (전투 능력 점검(ORI)을 통과한 이후 51년 10월1일 제10전투전대가 강릉 비행장으로 전진, 단독 작전을 무난히 소화해 낸 결과물이 이같이 나타난 것이다.

단독 작전·전투란 미 5공군으로부터 미 고문단 6146부대 앞으로 작전 명령(frag order)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엔 참전 16개국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ROK Air Force) 앞으로 직접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전에는 한국 공군이라는 용어도 미 고문단 6146부대 밑에 깔려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미 고문단을 제치고 우리 공군 앞으로 독자적 작전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