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56>제3話 빨간 마후라 -106- 에티오피아 대사 선택

화이트보스 2009. 5. 27. 20:59
<356>제3話 빨간 마후라 -106- 에티오피아 대사 선택

김영재 선배는 김홍일 장군의 친조카로서 중국 공군 장제스(蔣介石) 장군의 전용기 정비사 출신이었다. 그만큼 신임이 두텁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의 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폭사케 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직접 제조해 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그가 10전투비행단 기지 시절의 어느 날 혼자 툴툴거리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김선배, 무슨 일이 있습니까.”

“또 딸이야. 여섯 번째야.”

행여나 했는데 또 딸이라는 서운함으로 그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위로했다.

“한 번만 더 도전해 보세요.”

“그런 소리 말어. 집에 들어가면 계집애들이 방마다 널부러져 있고 남자라고는 나 혼자뿐이니 신물이 나. 들어가기가 싫어.”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도전해 보시라니까요. 그러면 들어가고 싶은 집이 됩니다.”

그렇게 하고 헤어졌는데 몇 개월 후 그가 나를 보더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인상을 보였다.

“왜 좋은 일 있습니까.”

“또 (아이를) 가졌대.”

남의 말 하듯 했지만 그는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도전’ 했다는 뜻을 암시했다.

“잘하셨습니다. 틀림없이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나는 이렇게 위로하고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서 그를 찾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말 말아. 또 딸이야. 일곱 번째야.”

그는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었다면 맨 먼저 나를 찾았을 사람이다. 나는 아내를 시켜 뒤늦게 미역을 사 보내고 했지만 그의 막내딸은 내 강요에 의해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다행히 효성 지극한 막내딸이었다고 하니 안심이다). 어쨌든 나도 그에 대한 예의로 7남매를 둘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기분으로 살 수가 없다고 판단, 기왕 태어난 애들이라도 잘 기를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잘 보살피지 못했으니 가장으로서 도리가 아니었다.

전역 후 행정개혁위원회 부위원장(장관급)에 위촉됐으나 비교적 한가한 자리여서 그동안 못다 한 아버지 도리를 위해 학교 다니는 아이들 뒤따라 다니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무부에서 연락이 왔다. 대사 자리가 네 군데 나왔으니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대사 자리에는 A급지도 있었으나 나는 그중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다. 이 나라를 선택한 데는 내 나름의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자 셀라시에 황제와의 인연이 그것이다.

내가 총장 시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6·25 전쟁 때 16개 유엔 참전국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래서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 방문 때 전사자가 많은 강원도 평창에서 참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는데 내가 수행하게 됐다. 이때 본 꼿꼿하고 늠름한 80 노객의 황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참전 군인들이 중동부 전선을 지키며 큰 전공을 세웠다는 전사(포로가 없는 군대, 맨발로 액체 독가스 지대를 통과해 적을 파괴)를 보면서 에티오피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시바 여왕의 후손으로서 누대의 왕족이었으며 그 기품과 꼿꼿한 자세는 비동맹 국가 지도자들의 리더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비동맹 국가는 미국·소련 등 열강의 동맹 정책에 반대해 온 동맹체로서 유고의 티토 대통령,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과 함께 아프리카에서는 셀라시에 황제가 주도하고 있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따라서 아프리카의 대부나 다름없었다.

이런 인연과 호기심으로 에티오피아 대사를 원했는데 부임하자마자 나를 맞은 것은 창궐하는 콜레라였다. 1년 새 20만 명이 병사했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큰딸과 대입 준비 중인 고3 장남을 두고 세 아이를 데리고 임지에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역병에 꼼짝달싹 못하게 돼 버렸다.

콜레라가 도는 지역은 완전 격리된 채 어느 누구도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콜레라 주사약이 절대 부족해 매일 수천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청와대에 지원 요청을 급전으로 때렸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