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바다로 세계로!

<390>바다로 세계로! -20- 인천상륙작전-6

화이트보스 2009. 5. 27. 21:23

<390>바다로 세계로! -20- 인천상륙작전-6

미 해병대의 월미도 상륙에 뒤이어 오후 만조 시간을 기해 한국 해병대가 참가하는 연안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H 아워를 두 시간여 앞둔 15시30분 긴급 대기 명령이 떨어져 LSD(상륙함)에서 내려진 LCVP(상륙주정)가 수송함에 접근하는 가운데 16시45분 함포사격과 함재기들의 폭격이 시작됐다.

나는 영흥도 작전을 마치고 손원일 총장이 타고 있던 수송선 피카웨이 호에서부터 총장을 수행하면서 이 작전을 참관했다. 손제독은 한국 해병대 수송선이 부산을 출항할 때부터 수송선에 동승,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미 대통령 특사 로우 장군도 함께했다.

저녁놀이 지기 시작한 하늘에 새카맣게 날아가는 함재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활개를 펴 보았다. 폭격을 받은 인천 시가지에 검은 연기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함포사격과 함재기들의 포격이 무차별적으로 수행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한 공격이었다. 인구 25만 명 대도시의 민간인 피해도 고려해야 하고 상륙에 성공해서 이용할 시설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작전이었다. 무엇보다 항만 시설을 보호, 상륙부대의 보급기지로 활용하려면 무차별 포격을 가할 수 없는 일이다.

스트러블 제독은 인천을 60개 구역으로 세분화해 위험도가 큰 지역은 적색 해안(레드비치)으로 지정, 어느 함정이라도 사격을 할 수 있게 했다. 그 외 황색 해안·청색 해안 등에서는 공격 목표물이 발견돼도 관측기의 유도를 받아 공격하도록 제한했다. 민간 피해를 줄이고 비군사 시설을 보호하려는 배려였다.

‘경인 지역에는 우리들의 동맹국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아군은 이 지역 시설을 이용할 계획이다. 폭격·포격은 아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목표물로 제한해야 한다.’JTF-7(제7합동기동부대) 사격 계획서에는 이런 방침이 명기돼 있었다.

한국 해병대 선발대가 만석동 해안(레드비치)에 상륙했을 때 인천 시가지는 온통 불바다였다.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중 폭격으로 인한 화재와 도주하는 인민군의 방화로 큰 길가의 건물은 물론 골목 안 주택가에도 불난 집이 많았다.

북새통 속에 주민들이 다 어떻게 피난을 갔는지, 시가지는 텅 빈 것 같았다. 부서진 건물 여기저기서는 오렌지 빛 불꽃과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길가에는 깨진 벽돌과 유리 조각·나뭇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대원들은 적을 소탕하기 위해 빈 건물과 주택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보이지 않고 벗어 놓은 군복만 팽개쳐져 있었다. 도망치면서 민가에 들어가 인민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변장해 피난민 대열에 섞여 버린 것이다.

미처 민간인 복장을 구하지 못한 인민군 병사들은 길가 밭이나 벼가 익어 가는 논에 숨어 있다가 해병대의 총격을 받았다. 첫 전투에 대한 긴장과 기대와는 달리 적의 저항은 아직 미미했다. 시가지를 포기하고 저항선을 내륙 쪽으로 옮긴 때문이었다.

“그때 해병대원들에게는 세 가지 금기 사항이 하달됐습니다. 첫째, 돈을 탐내지 말라. 둘째, 여자를 탐하지 말라. 셋째, 술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가를 수색할 때도 적병 잠복에만 관심을 쏟았을 뿐 물과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강복구 예비역 대령은 순수하고 올바르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일화 한 토막을 얘기했다. 대대 보급관이 어떤 민가를 수색하다가 상자에 지폐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세 가지 금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했다면서 훗날 우스갯소리처럼 후회하더라는 것이다.

<정리 = 문창재(언론인)>

2006.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