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여름 미군 보병 중대장으로 강원도 양구 전선에서 고지전을 치른 샘 웨슬 미 육군 예비역 중장(79). 웨슬 예비역 중장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우리는 한국을 존경하며, 한국의 자유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국가를 지향하는 한국민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미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 육군보병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샘 웨슬 예비역 중장
“한국전에 참전했던 우리는 한국을 존경하며, 한국의 자유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국가를 지향하는 한국민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여름 미군 보병 중대장으로 강원도 양구 전선에서 고지전을 치른 샘 웨슬(79) 씨. 그는 19일 조지아주 남부 포트 베닝에서 열린 미군 보병박물관 개관식에 참석, 한국전 전시관을 둘러보며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60년 가까이 흐른 전투상황을 어제 일처럼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휴전회담이 진행 중인 상황이어서 상부의 명령으로 공격은 할 수 없었고, 야간정찰을 통해 적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곤 했는데 한번은 정찰 도중 인민군이 부대 우측 고지로 접근해오는 것을 보고 박격포 공격을 요청했어요. 아군과 적군 모두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지만 우리 보고로 적의 공격을 좌절시켰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전에 대대장, 여단장으로 참여하고 미 육군보병학교장과 나토군 감찰관 등 요직을 거쳐 1986년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10여개의 훈장을 받은 그였지만 1953년 4월 한국전에 투입될 때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지 채 1년이 안 된 신참 지휘관이었다.
미군 보병 45사단 279연대 3대대 I중대장으로 양구 근처 ’샌드백 캐슬(Sandbag Castle)’에 배치된 그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부대원들의 안전과 생명이었지만 지뢰사고로 부대원 4명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당시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미군은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던 반면 중공군들은 나팔을 불며 인해전술로 공격을 해 인근 중대의 경우 220여명의 중대원들이 하룻밤 새 장교 1명과 사병 4명을 제외하곤 전원이 죽거나 다치는 등 피해가 컸다고 한다.
한국군 20사단이 담당하던 ’크리스마스 힐’ 고지를 인계받기 위해 대대 선발대로 파견됐던 7월4일의 아찔했던 일도 생생하게 회고했다.
“장맛비가 쏟아져 참호는 빗물로 가득했는데 에어매트리스에 의존해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한국군 대대가 주저항선(MLR)을 놔두고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의사소통이 잘못돼 미군 주력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대섹터가 완전히 적에게 노출된 채 5명의 선발대가 지키는 형국이었다”면서 “중공군 공격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신이 함께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최전선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던 웨슬과 중대원들에게 1953년 7월27일 휴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정찰팀 20명을 이끌고 오후 4시부터 수색정찰을 나갈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중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밤 10시를 기해 전쟁이 종료된다’는 것이었어요. 무거운 탄약통을 메고 이동하지 않기 위해 남은 4시간동안 양측 모두 허공을 향해 총을 쏘며 탄약을 소비했어요. 정확히 밤 10시가 되자 거짓말처럼 총성이 멈추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I중대 앞 적 참호에서는 수천여명의 중공군들이 개미처럼 쏟아져 나왔고 영어로 ’공산주의자들도 휴전을 축하한다(Communist congratulations)’라고 쓴 흰 깃발을 내걸었다고 한다.
웨슬은 이어 “휴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이동할 당시 이미 미군이 인도차이나의 베트남으로 투입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고 설명했다.
웨슬 중대장은 휴전 뒤 1년 정도 더 한국에 주둔하다 54년 8월 한국을 떠났다. 이후 1982년 거의 3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전쟁 때 파괴됐던 조선호텔이 고급호텔로 부활하고 고층건물이 즐비한 것으로 보면서 매우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시절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을 도왔던 당시 13살 정도의 ‘임학덕(Im Hak Dak)’씨를 죽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다고도 했다.
현재 포트 베닝 인근 콜럼버스시에서 부인 에일린 여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웨슬은 1981년 흑색종 암 발병으로 1년도 못살 것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퇴역을 거부하고 두 차례 수술 끝에 건강을 회복한 일화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미군내에서 전형적인 ‘야전형’ 지휘관으로 유명한 그는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에 대해 “미사일이나 폭격을 통해서라도 발사실험대를 파괴해야 한다”면서 “북한과는 대화로서 문제가 해결된 적이 없으며, 테러리스트들과는 대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군보병학교장을 지낸 그는 “포트 베닝(보병학교)에 연수 온 한국군 장교들도 매우 지적이고 직업정신이 투철했다”고 회고한 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고 묻자 “우리가 한국전에 참전해 미국과 한국을 위해 싸웠듯이 한국의 젊은이들도 조국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