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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凡)이 꿈꾼 나라

화이트보스 2009. 6. 26. 09:14

백범(白凡)이 꿈꾼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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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25 22:03 / 수정 : 2009.06.25 23:32

"김구 옹은 늘 혁명가답게 간소하고 규칙적인 생활이다. 오전 7시 기침(起寢)하면 습자(習字)와 기도 독경(讀經), 신문읽기가 계속되며…." 광복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정을 전한 신문기사 일부다.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오전도 그랬다. 백범은 시집을 읽고, 젊은이들이 부탁한 휘호를 쓰고, 이른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그때 예고 없이 백범 거처 경교장을 찾은 포병 소위 안두희, 그리고 2층에서 울려퍼진 몇발의 총성. 74년 생애를 조국에 바친 노혁명가는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운명했다.

▶그로부터 꼭 60년이 흐른 지금 서울 효창동 그의 묘소 옆 백범기념관엔 유혈이 낭자하던 당시 경교장 2층의 흔적이 재현됐다. 백범이 입었던 하얀 저고리와 속적삼이 피범벅 된 채 수장고에 보존돼 오다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고 있다. 가슴께 흉탄이 뚫고 지나간 구멍까지 선명하다. '思無邪(사무사)' '愼其獨(신기독)'. 백범이 써놓은 휘호와 거기 튀었던 핏방울도 그대로 남아있다. 서거 6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추모특별전이다.

▶기념관 측은 백범 서거를 설명하며 "통일운동 반대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총탄에…"라고 썼다. 총성 직후 경찰이 출동해 안두희를 연행하려 했으나 군복차림 청년들이 나타나 "어떻게 경찰이 군인을…" 하며 안두희를 지프차에 싣고 사라졌다. 백범에 대한 공식 추도식이 가능해진 것은 4·19 후인 1960년, 11주기 때부터였다.

▶백범은 비운에 갔지만 늘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백범의 인간적 크기와 함께 그가 꿈꿨던 나라 중 어떤 것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백범이 열망한 나라는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였다. 그는 또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대한민국이 문화의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꿈꾸었다.

▶한국 현대사의 아쉬움을 백범에 의탁해 풀려다 보니 일각에선 백범의 사상과 노선을 자기 위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신용하 백범학술원장이 얼마 전 "백범이 통일을 위해 좌익까지 아우르려 했던 걸 두고 그를 좌파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한 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런 사회분위기 탓일까. '백범일지'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지만 요즘 같아선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듯,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和氣)가 빛나야 한다"는 말에 특히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