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탈북
1989년 긴 갈등 접고 강원도 정선 산중으로 숨어
아내와 결혼해 자연과 벗하는 삶
동부전선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 용산골 북한 인민군 제1집단군에 복무 중이던 21세 청년 리영광은 입대한 지 석 달 만인 1967년 9월 18일 밤 휴전선을 넘었다. 추석날이었다.
한 달 뒤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귀순용사 리영광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귀순 동기는? 리영광이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왔다.” 냉전시대, 정보기관에서도 그의 맹랑한 귀순동기를 분석하기 위해 애를 먹었고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 리영광과 아내 박안자.
42년이 흘렀다. 리영광은 지금 강원도 정선의 첩첩산중에 살고 있다. 세계 일주 대신에 자연과 생명을 추구하는 철저한 자연주의 철학자로. “내가 어디에 사는 지는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신신당부에 따라 정선의 한 오지(奧地)라고만 해두자.
리영광이 사는 집 앞 계곡에는 물이 맑게 흘렀고 산에는 신록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마당에는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개량한복을 입고, 수염과 머리를 기른 리영광은 애시당초 그 풍경의 일부분인양 딱 어울렸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저 곳에는 무엇이
1946년 함북 학남면에서 태어난 리영광은 전쟁이 터지자 외갓집이 있는 개마고원으로 피란을 떠났다. 2남3녀의 맏이다.
두 가지가 기억이 난다. “곳곳에 피어 있는 작약 꽃. 지금도 산에서 작약꽃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또 하나는 땅 끝이다. 백두대간의 지붕 개마고원을 쏘다니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 저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늘 궁금했다. 저기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우리나라 바깥은 어떻게 돼 있을까.”
리영광은 책방에서 사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책을 읽었다. 해로를 통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그리고 조총련계 잡지 ‘시대’에서 본 ‘칫솔 하나 들고 무전여행을 떠난 서양 젊은이 사진’을 보며 꿈을 키웠다. 언감생심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다
1967년 양강도 혜산고등기계공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어느날 밤, 리영광은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의 한 목장에 숨어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인민해방군 3명에게 붙잡혔다. 조사를 받고 수용소로 이첩됐는데, 오줌 누고 온다고 핑계를 대고 탈출해 강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인민군에 자원했다. “그때는 세계일주라는 꿈에 붕 떠 있었다. 남쪽 국경으로 가면 또 다른 세상을 볼 확률이 높았으니까.” 두 달 후 영장이 나왔다.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부모님을 대동하고 와서 동의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북한이) 좀 억압적인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길러준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군대에 간다’라고 하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네 삼촌이 월남했는데 영장이 나왔으니 우리 성분도 그리 나쁘게 평가받지는 않았다는 증거라 시원하고, 장남이 떠난다니 섭섭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떠날 때까지 꼭 나 잠들고 난 다음에야 꼭 주무시고 그랬다.”
그 해 6월10일 혜산역을 떠났다. “열차 바퀴가 움직이기 전에 아버지 얼굴 보니까 까맣게 된 게 침통해 보였다. 아들이 마음에 떠돌이 기질을 갖고 있으니까 군대가 아니라 영원히 없어질 거 같다는 생각을 하신 거 같다. 나는 그것도 아랑곳 않고. 어차피 세계일주하려면 집을 떠나야 하니까.” 그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42년 전이다. 리영광이 잠깐 말을 멈추더니 원두막 지붕 너머 산을 한참 바라봤다.
휴전선을 넘다
입대 후 석 달이 지난 1967년 9월 18일 추석날 밤, 리영광은 초소를 이탈했다. “비탈을 한없이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떼는데 눈에 뭔가가 걸리는 것이다.”
피아노선을 연결한 대인지뢰였다. 좌우를 살피니 막 지뢰 안전핀이 빠지려던 참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머리 뼉다구도 못 건지고 죽을 뻔”한 것이다.
그 죽음의 선을 탈출하고 나니 갈대밭이었다. “거기 김일성이 어딨고 박정희가 어딨나. 정말 평화로웠다. 비무장지대 아닌가. 무장이 없는.” 낭만에 젖은 리영광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이 쏟아졌다.
함께 초소에 근무하던 전우들이었다. “전우들이 일부러 나를 안 맞힌 거다. AK자동소총 탄창 하나에 총알이 30발인데, 세 명이서 90발을 쏴댔다. 그들과 나랑 거리가 20미터도 안 됐는데 맞추지 못했다. 북쪽만 열어놓고 동, 서, 남 세 방향으로 쏜 거다. 죽지 말고 돌아오라고.”
리영광이 물을 한껏 들이켰다. 산에서 연결한 파이프에서 흐르는 맑고 찬 생명수다. “생명 귀한 건데 어찌됐든 살아 왔으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네.”
너무나도 시끄러웠던 남한의 도시(都市)
남한 정부에서는 귀순용사를 한국전력에 취직시켜줬다. 남한은 가난했고 시끄러웠다. 개마고원처럼 혹독하게 춥되 아늑한 자연은 없었다.
“돈이 꿈이었으면 북쪽에서 벌지. 내가 원했던 것은 자-유-였다. 코앞에서 쏴대던 총소리가 그 이후 10년을 귓전에 맴돌았다. 도시는 시끄러웠고, 내 성질이 모질어서 걸핏하면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이었다. 사람이 잠 잘 때는 조용하고 어두워야 하는데, 이건 무슨 사람 살 곳이 아닌 것이다.”
몇 달 만에 서울 용산경찰서로 찾아가 “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몰았다. 1983년 서른일곱 살이 된 리영광은 깨우쳤다. “여기(도시)는 내가 살 데가 아닌데, 왜 도시에 있지.”
북한을 나올 때, “아버지 환갑 될 1983년이 되면 남북관계가 좀 좋아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1983년이 되어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이여 안녕”하고 지방을 떠돌았다.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환갑을 맞았다. 1984년 춘천으로 가서 남엣집 머슴살이를 하며 자연을 접했다. 그리고 삼촌네 사돈댁 땅인 이곳 강원도 정선 산중에 왔다가 자연이 맘에 들어 눌러앉게 된 것이 서울올림픽 다음해인 1989년이었다. 딱 20년 되었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100년 된 집에 살며 리영광은 지금 개마고원을 닮은 자연과 벗하며 산다. “좋은 집 지어준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산다”고 했다.
풀 밟지 마라, 아프다
캠코더 녹화 테이프를 막 갈아 끼우려던 참에 산새가 울었다. 한참 말이 없던 리영광이 이리 말했다.
“살아 있다는 거 자체가 좋은 거 아닌가. 개복숭아 곱게 피어난 계절에 연한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이 때, 봄바람이 불어대고 새가 우짖는 이 좋은 날에 내가 살아서 말을 한다는 게 좋은 거니까. 저 뒤뜰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약, 연꽃 같은 새하얀 작약이 피어 있고 곰취에 참나물, 온갖 것들 꽉 차 있어. 너무 풍족한 곳에 살지. 요새 바깥 세상 어렵다고 하는데, 옛날 생각하면 어려운 거도 아니야. 상대적인 빈곤이지. 펑펑 쓰다가 좀 못 쓴다고 어렵다고 하니. 물론 힘든 사람도 있겠지만.”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이다.
“얘들은 철을 알아. 제 철에 모든 걸 다 해. 때가 되면 그 때를 어기지 않아. 날짜를 적어보면 그때에 나오고 그때에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시간을 안다는 거지. 봄이 되면 나오고 가을 되면 열매 맺고 어기지 않는, 그 왈(曰) 자연(自然)이지, 있는 그대로. 나는... 철이 없어서 이렇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나.”
복사꽃이 농염하게 피어 있는 마당은 ‘들풀’ 세상이었다. 그들을 밟기라도 하면 리영광이 얼굴을 찌푸린다.
“쟤들과 우리는 한 몸인 거야. 다만 움직이지 못할 뿐. 우리는 움직이는 그 차이야. 밟으면 안 되지. 먹을 때가 되면 세 잎 나면 한 잎만 따고, 다 안 따고 쌈 해 먹고 그러지. 나도 살아야 하니까. 대신에 마음으로 미안하다, 하면서 뜯지. 쟤들과 나는 한 생명이니까 귀한 거지.”
“여기는 뭐든지 심으면 잘 돼. 대신에 노루하고 토끼하고 나눠먹어야 하지. 고추 심으면 노루랑 토끼가 먹고 가. 무도. 걔들이 아예 먹고 자고 아침에 가. 그리고 먹고 남은 거 우리가 먹고. 걔들이 양심이 있어. 농사짓는 사람 먹으라고 남기는 거지.”
쉰 먹은 노총각과 이혼녀 결혼하다
‘우리’는 리영광과 부인 박안자(59)다. 1998년 그를 주인공으로 한 TV 다큐멘터리가 전파를 탔다. 남편과 헤어지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던 부산 여자 박안자가 TV를 봤다. 비 쏟아지는 운두령을 비옷 입고 자전거 타고 오르는 리영광의 뒷모습 엔딩 씬을 보고 “죽더라도 저 사람 만나고 죽는다”며 무작정 이 골짜기를 찾아왔다.
닷새를 함께 살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나 죽는 거보다 당신이랑 같이 사는 게 나을 거 같다”고. “나는 총각이니 일년 정도 사귀다가 결정하자”는 리영광을 달달 볶아서 “나 시간 없다”고 일주일 만에 결혼을 했다.
세계일주 이후로 연기해뒀던 일체의 사람살이 가운데 결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결혼한 이래 두 사람은 죽음도 못 갈라놓을 연분을 맺으며 살고 있다. 24시간 함께 살면서 대화도 둘이서 하고 잠도 둘이서 자고 산도 둘이서 보고 산책도 둘이서 한다.
몇 년 전 두 사람은 금강산을 다녀왔다. “가지 말 걸. 나라가 하나 된 다음에 내 멋대로 다닐 걸. 남북 갈라져 있는 게 너무 아팠다. 좋은 거 본 것만큼 마음이 아팠다.” 리영광은 한참 동안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이후 리영광은 여행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대신에 자연과 산다. 험난하기 짝이 없고, 멀기 짝이 없는 긴 여정을 지나 개마고원을 닮은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약꽃이 불러일으키는 그리움
“귀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리영광이 나를 집 뒤쪽으로 데려갔다. 비탈과 담벼락 사이에 좁은 공간이 있는데, 온갖 풀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이었다. 둥굴레, 명이, 곰취, 참나물, 원추리, 더덕... 그 가운데에 눈에 확 띄는 새하얀 꽃이 있었으니, 그가 그리도 자랑하는 작약이었다.
“정말 귀한 식물이야. 어릴 때 개마고원에서 봤는데 가슴이 설레지. 하얀 연꽃 같아. 오늘도 산에서 다섯 포기를 보고 왔는데,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 자연이기도 했고, 그리움이기도 했다. 못 다 이룬 꿈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가족을 버렸으니 그 회한과 죄스러움은 언급할 이유가 없다. 그 또한 몇 가지 회한을 이야기했으나 그 서글픈 인지상정은 구태여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 서글픔, 말한들 무엇 할 것인가.
“그 전에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어려서 지구 한바퀴 돌고 싶었던 거지. 나이를 먹고 보니 지금은 압축해서 자연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곳 티베트 몽골에 갈 꿈을 간직하고 살고 있어. 도시 같은 데는 아무리 화려해도 가 보고 싶지 않아. 언젠가는 꿈이 이뤄지겠지.”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원두막 멀리를 손가락질했다.
“어딜 가면 늘 궁금해. 우리나라 바깥은 어떻게 돼 있을까. 그래서 젊을 때는 지구 다 돌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궁금증이 다 해소됐으니까 몇 군데 자연 살아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어. 고향 가는 거? 포기했어. 첫 단추를 잘못 낀 거니까. 20대에 허황된 꿈 때문에 남쪽에 나온 게 내 실수지.”
하지만 그는 늘 그립다. 고향이 그립고 세계가 그립다. 김찬삼을 읽고 한비야을 읽으며 간접여행을 했으니 여행 필요 없다고 소리치지만, 자유를 찾아 먼 길을 떠났던 노인의 말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더 큰 꿈은 나라가 하나 되면 동해에서 남해 서해를 고무보트 저어서 압록강, 두만강 다 가는 거야. 남태평양 피지섬까지. 거기 가면 밤이면 형광빛으로 빛나는 크릴새우 떼를 보고, 산호섬에 가서 목욕하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꿈이 있지. 그런데 피지까지가 8000km라는데 갈 수 있을까. 내가 늙어서 노를 저을 수 있을까. 돛단배를 띄우면 될 텐데, 피지까지 가려면 적도를 지나야 하는데, 적도는 무풍지대라 돛단배도 안 된다는데...”
그렇게 그 숨어 있는 골짜기에서 광대한 꿈을 가진 노인을 만났는데, 슬펐고, 장엄했고 우아했으며 나도 모르게 그의 꿈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