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대중·顧問
북(北)은 핵을 포기 못한다 중국은 목 조를 생각없다
미국은 이를 용납 않겠으나 군사적 제재는 힘들 것이다
북(北)은 상황을 꿰뚫고 있다 한국은 어찌 해야 하는가
북한의 핵(核)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세 가지 가설(假說)을 세울 수 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가설은 김정일 정권은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이미 널리 기정사실로 돼 있는 상태다. 북한이 내건 조건들은 그냥 '모양'이다. 북한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로지 핵 때문이며, 핵만이 북한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김정일 가문의 통치를 지탱하는 유일한 무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6자회담 등 지금 거론되고 있는 다양한 행태의 접근방법은 기실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두번째 가설은 중국의 역할과 관련, 중국은 북한 정권의 존재를 위협하면서까지 북한의 목을 조를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관련 당사국들, 특히 미국은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중국이 북한에 무엇인가 압력을 넣어 주기를 기대해 왔다. 북한의 경제·외교 등 상당 부분이 중국에 의존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마디로 북한이 망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북한이 핵 문제를 비롯, 주변국가와의 관계에서 타협적으로 나와 공존을 모색하고 그 결과로 중국이 대북지원의 부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북한이 그 길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북한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우선 북한정권이 붕괴돼 수십만 명 또는 수백만 명의 북한인들이 중국 동북 3성으로 탈출하는 경우, 중국이 입을 막대한 타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은 또 북한 정권이 붕괴될 경우,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국 또는 한국과 우호·동맹관계에 있는 미국 등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6·25 전쟁 때 중국의 개입이 미국 등 서방국가의 만주 진출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번째 가설은 미국은 어떤 경우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과 같이 세계 질서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나라가 가장 위험한 장난감 즉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수반하지 않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는 '세계 경찰적' 관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협상의 길을 열어놓고 조건을 논의하자는 것이고, 북이 지금처럼 핵실험 등 오히려 엇박자로 나가는 것을 각종 경제제재와 외교적 압박 등으로 막아보려 하고 있다. 그것이 북한을 벼랑으로 몰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과연 군사적 제재까지 동원할 것인가다. 현재로서 미국은 그럴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이라크에서 큰 상처를 입고 겨우 봉합을 한 처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보다 더 어렵고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을 상대로 또 다른 군사적 전선을 형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적 관찰이다.
북한은 바로 그런 사정들을 꿰뚫고 있다. 지금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연일 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그런 사정을 이용해 북이 핵보유국임을 대내외에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북한은 또 중국이 겉으로는 유엔 제재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없는 동북아'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북한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이 핵 게임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이나 북한 제재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북한이 믿는 구석이다.
이런 여건에서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대북 '가설'은 어떤 것인가. 하나의 가설은 북핵을 머리에 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도 않고 강대국들이 북핵을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그럴 경우 우리가 북핵을 얻어맞지 않으려면 북한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돈 주고 식량 주고 달라는 대로 주면서 그것이 마치 '평화에 대한 보험'인 양 여기며 굴욕적으로 사는 것이다. 어느 전직 대통령의 주장처럼 말이다. 다만 평화를 일시불로 사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무기한 인질 잡혀 질질 끌려가야만 하는 '한국의 인생'은 가련할 뿐이다.
다른 가설은 당장은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의 볼모상태로부터 과감히 탈퇴하는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군사적으로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가장 위험한 가설이다. 미국과 중국으로부터의 비군사적 제재에 시달린 나머지 북한이 취할 수 있는 탈출구가 결국 대남 군사보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겪으며 거기서부터 새로운 남북관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한가지 돌발적 가설이 있다. 그것은 북한 정권 내부의 변화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이은 북한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다. 김정일의 건강과 관련한 북한 지도부의 갑작스러운 변화, 그 내부에서 벌어질 정치적 암투와 인민들의 새로운 의식은 북한 자체를 크게 뒤흔들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가장 흥미로운 가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