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멸망을 막아 우리 역사 지켜준 고마운 나라 - 티벳(Tibet)
알다시피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663년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당의 속령(어떤 나라에 딸린 영토)으로 편입하려 했다.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동북아 지배를 완성하는 듯했다.
아직 김유신과 같은 노련한 지휘관이 있었지만 동북아를 평정한 당나라는 이미 한족이나 중국 본토만의 능력을 넘어 말갈족이나 거란족 등을 사주하여 언제나 대규모 전쟁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국(帝國)이었다. 고구려에 비해 모든 면에서 국력이 취약한 신라가 과연 곧바로 닥쳐올 당나라의 침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신라의 결론은 먼저 당을 공격하자는 선제공격론이었다. 669년에 검모잠이 평양성을 회복하고, 이어서 토번(티벳)이 신장 위구르 지역에 진출하면서 당나라의 서역 방어선과 교역로가 위협을 받았다. 티벳이 실크로드를 장악할 경우, 이권뿐만 아니라 당의 수도인 장안조차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안동도호부의 설인귀 군대를 급히 티벳(토번)과의 전쟁에 동원하면서 신라에 대한 압력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신라 문무왕은 670년 3월 고구려유민군 1만명과 신라 군대 1만명을 연합군으로 삼아 압록강 너머 당나라군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이 나당전쟁의 서전(처음에 하는 싸움)이었다. 전쟁 직후 신라는 671년 6월경 백제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은 671년 말갈군과 연합하여 요동지역의 반당(反唐)세력을 누르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672년 7월에는 평양을 점령하면서 신라의 고난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674년 초 당 고종(高宗)은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칠중성이 실함되는 등 한강 임진강 유역의 신라군의 마지노선(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이 붕괴되면서 일시적으로 당나라군이 남부로 침략할 길이 열려 신라는 큰 위기에 처했다.
이때 토번(티벳)이 또 한번 당나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도왔다. 당은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다급했고, 이에 당나라 정예군은 토번지역으로 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라와의 전쟁은 옛 고구려의 복속세력이었던 말갈군을 중심으로 재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군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675년 9월 당나라는 이근행(李謹行)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20만 군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켰다. 그러면서 대규모 원정대의 보급을 위하여 설인귀로 하여금 신라 숙위학생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임진강 수로변의 천성(泉城; 파주시 오두산성 일원)으로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라군이 교묘한 매복 작전으로 천성에서 적의 보급선단을 궤멸시켰고, 보급로가 막힌 매소성의 당군 20만은 모든 물자를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런 매초성 싸움에서도 신라가 이기게 된 데는 티벳의 도움이 있었다.
그 후 매초성에서 이근행이 후퇴한 다음 이근행의 정예군은 이듬해 토번(티벳)과 전쟁을 벌인다. 676년 3월 이근행은 청해(靑海)에서 벌인 토번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승리 이후 정예군이 다시 신라로 향하게 되고 다시 신라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때 신라군은 적을 바다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676년 11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앞바다에서 당나라와 일전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얻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신라는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는 한반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678년 당 고종은 다시 신라 정벌을 천명한다. 그러자 다시 토번의 가르친링이 당나라로 진출하였고, 여기에 18만의 당나라군이 청해에서 참패(승풍령 전투)를 당하자 결국 “토번이 당나라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노략질을 하고 신라는 비록 순종치 않지만, 군대가 중국을 침범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신라 침공을 중지하였다.
이후 692년에는 당의 왕효걸 부대가 토번을 제압 안서도호부를 세웠고, 당나라의 야심은 다시 신라를 향했으나 695년 다시 티벳(토번)의 가르친링이 당나라군을 격파하여 장안성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토번은 당나라의 예봉(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이 한반도로 미치지 않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토번(티벳)은 한반도의 역사를 지키고 신라 멸망을 막아 준 고마운 나라이다. 비록 고원지대에 살면서 이렇다 할 힘을 가지지 못한 채 1951년 중국공산당의 침공을 받았지만, 티베트는 중국과 다른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면서 위대한 불교문명을 이끌어 온 문화민족이다.
또한 티베트 국민의 개별 정체성은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모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는 다른 민족국가이다.
항간에 21세기에 무슨 민족주의인가라고 말하지만, 민족주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리고 다원화됨으로써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충성심의 일종이다.
민주국가에서 불교나 기독교 교리 등 종교적 심성에 충성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는 민족에 충성하는 것 그러면서 세계와 공존하는 불교를 모태로 한 민족정신에 충성하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티벳인들의 민족의식은 보호되어야 한다. 나아가 티벳에 깊은 은혜를 받은 우리나라가 또한 그들의 독립을 향한 아우성에 공감하는 것도 우리 또한 그런 시절(일제 강점기)을 보냈던 가슴 아픈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화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존재하는 한 현재 티벳의 고난은 반드시 극복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양학부 김인호 교수
출처 : "디지털경성"과 "한양대 웹진" 에서 발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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