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옥살이…기구한 안중근 조카며느리
한반도 수탈의 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1950년대 중국 땅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안 의사를 추모하다 반혁명 분자로 몰려 40년간 옥살이해야 했던 안 의사의 5촌 조카며느리가 하얼빈에 생존해 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난강(南崗)구 안산(安山)가에 살고 있는 올해 97살의 안로길 할머니.
그녀의 삶은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만큼이나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했다.
17살 나던 해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홍근(洪根)씨의 3남 무생(武生)씨와 결혼한 안 할머니는 결혼 14년만인 1944년 일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남편이 사망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당시 2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여살던 북만주 최대 한인 천주교 마을이었던 헤이룽장성 하이룬현 하이베이전 쉬안무촌에서 생활했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안 의사 가문의 며느리라는데 자긍심을 갖고 있던 안 할머니는 이때부터 원래 차(車)씨였던 성을 안(安)씨로 바꾸고 안 의사의 독립활동을 알리는 한편 입버릇처럼 '대한독립'을 외쳤다.
남편이 사망한 뒤 하얼빈으로 이주한 안 할머니는 일본이 물러간 뒤에도 바느질 삯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하며 안 의사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집에 걸어놓고 독립군을 상징하는 군복에 별을 새긴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1950년대 냉전체제하에서 중국 공산당의 사상 탄압이 거셀수록 안 의사를 기리는 안 할머니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이적 행위 단속과 종교 탄압이 거세게 몰아치던 1958년 안 할머니는 하얼빈역 광장과 하얼빈 다오리(道理)구 공안분국 앞에서 태극기와 안 의사 초상화를 앞세우고 안 의사 공적 인정과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인 안 할머니의 행위는 당시 중국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정치적 범죄 행위였다. 결국 안 할머니는 1958년 1월 긴급체포돼 반혁명죄로 무기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게 됐다.
차가운 감옥이나 서슬퍼런 중국 당국의 탄압도 안 할머니를 막지는 못했다. 치마 실오라기를 풀어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감옥에 걸어놓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립군복과 모자를 만들어 입고 쓰기를 고집했다.
갖은 회유와 압박에도 안 할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중국 감옥 측은 결국 '정신병자'쯤으로 취급, 안 할머니를 단속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나 개조 불능의 불순분자로 낙인 찍힌 안 할머니는 1972년 네이멍구(內蒙古)의 오지 전라이 노동교화 감옥농장에 넘겨져 6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1978년 이 감옥농장에서 풀려났지만 안 할머니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다. 사회 진출을 막고 계속 감옥농장에서 일하도록 함으로써 절반의 자유만 허용됐던 것.
중국 내 개혁개방 바람이 불고 한국과의 수교가 이뤄진 뒤에도 억압된 상태에 있었던 안 할머니는 1998년 9월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86살 때의 일로 반평생 가까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낸 뒤였다.
하얼빈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를 반겨줄 곳도, 그녀를 뒷바라지해줄 일가친척도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안 할머니의 딱한 사연을 알게 된 최선옥(72.전 성모자애병원(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원장) 수녀의 도움으로 그녀의 아파트에 방 한칸을 얻어 함께 생활하고서야 안 할머니는 비로소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나마 강제 노역을 시켰던 전라이 감옥농장에서 뒤늦게 매달 지급하고 있는 200 위안(3만7천 원)의 보조비가 생활을 지탱시키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중국 인민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간 협정에 따라 재중 동포들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할 때 호구를 찢어 버리기도 했던 안 할머니는 호구에 올리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명을 고집하며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하는 수 없이 '안누시아'로 불리던 그녀의 세례명을 중국어로 음역해 '안로길'이라는 이름을 지어 일방적으로 호구에 올렸다.
뒤늦게 그녀의 출옥 사실을 알게 된 친척들은 한국 당국이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고 있다. 반평생의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를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 조국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안 할머니의 시 조카인 정덕재(71.랴오닝성 선양 거주)씨는 "100살을 앞두고 있는 외숙모가 지금 뭘 더 바라겠느냐"며 "평생을 바쳐 갈구했던 조국이 나서는 모습만 보여줘도 반평생 얽힌 그녀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양=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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