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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희가 만난 장애인 부부 안금용·변미형의 희망노래

화이트보스 2009. 7. 25. 14:11

박국희가 만난 장애인 부부 안금용·변미형의 희망노래

입력 : 2009.07.25 03:15 / 수정 : 2009.07.25 11:34

"세상에서 나만 아프고 힘든 줄 알았는데… 우리 만남은 행복"
"동화같은 우리 삶, 연극으로 희망을 전합니다"
트럭에 깔려 오른팔 잃은 변씨 "어린 백혈병 환자 보내며 더 아픈 사람 도울 생각"
하반신 마비였던 안씨 "변씨 보고 첫눈에 반한 후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지켜봐"

1997년 9월

눈앞에서 뭔가 번쩍하는가 싶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변미형(邊美衡·35)은 25t 트럭 밑에 있었다. 왼쪽 다리가 앞바퀴에 걸쳐진 채 허리가 뒤틀렸고 오른쪽 팔도 바퀴에 깔려 있었다. 감각도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1997년 9월 2일 오후 7시 경북 안동에서 일어난 일이다.

머리칼이 허리까지 출렁이던 아가씨는 추석선물을 들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중소기업 비서로 취직한 지 채 6개월도 안 된 신입사원이 실려간 곳은 서울 순천향대 병원이었다. 첫 진단이 12주로 나왔을 때 '아,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오산(誤算)이었다.

매일 대여섯 차례 수술 같은 치료가 시작됐다. 혈관이 터져 피부로 산소 공급이 안 됐다. 살 썩는 냄새를 그는 그때 처음 맡아봤다. 피고름을 짜내고 썩은 살을 자르고 찢고 꿰매는 일이 반복됐다. 변씨의 팔다리만 붙잡고 있는 의사가 4명이나 됐다.

6개월간 이 일이 계속됐다. 그제야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21살 여동생이 가자 의사는 "더 큰 어른 없느냐"고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27살 오빠에게 오른쪽 팔을 잘라야 한다고 했다. '떡'이 돼 버린 팔은 애초부터 살릴 가망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진을 보고 편집자는 "안금용씨는 매너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도로 중앙에 아내를 세웠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편집자는 "만일 반대로 세웠다면 서로 손을 잡지 못했겠네…" 라고 했다. 햇살 밝은 남산에서 부부가 걷고 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1997년 10월

변미형이 순천향대 병원 711호실에 입원한 지 한 달 후에 안금용(安金用·36)이 825호실에 입원했다. 부산의 한 카센터 보조로 취직한 지 6개월도 채 안 된 그의 몸 위로 육중한 승용차가 떨어졌다. 안금용의 허리가 말 그대로 반(半)으로 접혔다.

왼쪽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척추 뼈도 깨졌다. 다리 사이로 땅바닥에 처박힌 왼쪽 안구(眼球)가 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앰뷸런스에서 부산 동아대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그가 한 말은 "나 좀 펴달라"는 것뿐이었다. 모르핀을 맞아도 환상만 보였다.

1주일 만에 그는 서울로 옮겨졌다. 골반 뼈를 다 긁어내 부서진 척추 뼈에 시멘트 바르듯 발랐다. 쇠침을 지주(支柱)처럼 척추와 척추 사이에 박아넣는 수술을 두 차례 했다. 의사는 "제일 좋은 상황은 양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그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같은 병원에 입원한 변미형이었다. 안씨는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층 하나를 사이에 두고 2년 8개월 동안 같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 몸 상태를 알았기 때문이다.

여(女)와 남(男)

변씨는 1남4녀 중 셋째다. 벌목공 아버지는 25살 때부터 알코올 중독이었다. 변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늘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칼부림을 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팼다. 부모가 언제부터 떨어져 살았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9살 어린 막내 여동생만 어머니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일어나보니 언니 오빠는 돈을 벌러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이제 네가 우리 집의 어른"이라고 했다. 변씨가 중학생 때 어머니와 여동생이 탄 택시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어머니는 즉사했다. 6살 막내만 무사했다. 막내는 충격으로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막내가 변씨 집으로 왔다. 안동의 월세방에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여동생 2명과 함께 살았다. 가뜩이나 우중충한 집안 분위기가 더 우울해졌다. 그때부터 변씨는 아내이자 엄마이자 언니로 살아야 했다. 그랬던 그의 삶이 한순간의 사고로 완전히 망가졌다.

안씨는 경남 고성의 어촌이 고향이다. 4남매 가운데 셋째다. 멸치잡이 어선을 탔던 아버지는 3~4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1주일간 온종일 술만 마시다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가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술과 도박, 아버지가 남긴 외상 술값 갚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피조개와 꼬막씨를 키우는 일을 했다. 진주 세강고 전자과 3학년 여름방학 때 그는 당시 금성TV 14인치 브라운관 조립라인에서 일했다. 그때 "단순조립 기술로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생겼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동차 정비였다. 자동차 정비 자격증을 따고 경기도 파주 2기갑사단 수송부 정비과에 입대했다. 제대 후 삼천포 화력발전소의 소방설비 작업 보조로 1년을 일한 뒤 부산 누나 집에 살며 카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의 삶도 끝장나는 것처럼 보였다.

재생

변씨는 잦은 수술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나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자존심밖에 없었다"며 "혼자는 울지언정 남 앞에서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했었다"고 했다.

변씨는 머리를 2차례나 빡빡 밀었다. 병실에 우두커니 앉아 스스로의 아픔에만 젖어 있었다. 그즈음 병원 원목실 안영덕 목사가 변씨에게 백혈병 환자를 소개했다. 택시 운전을 하며 병원비를 대던 홀아버지 때문에 간병인 없이 지내던 10대 후반 남자 아이였다.

"머리를 밀어 비슷한 환자처럼 보였는지 다가가기가 수월했어요. 늘 죽만 먹는 그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되지만 제 밥도 주면서 나보다 아픈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지요. 세상에서 나만 아프고 힘든 줄 알았는데 그 아이를 보면서 오히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거든요."

아이는 첫 만남 후 6개월도 안 돼 저세상으로 떠났다. 아이의 임종날, 아이는 변씨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딸기우유…." 변씨는 의사에게 한 모금이라도 주자고 말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를 떠나 보내고 변씨는 "나보다 아픈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팔을 살릴 수 없는 걸 알면서 왜 '마루타' 같은 치료를 했나요.

"오기 때문이었어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나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이제까지 살아온 게 너무 억울했어요. 굉장히 열심히 살았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어느 날 내가 병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이건 내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가 팔을 자르자고 하지 않던가요.

"팔이 썩어들어가니까 균이 심장까지 타고 들어가면 목숨도 위태롭다고 하더군요. 3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3일 후 제 결정은 '자르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요."

―죽을 생각도 해봤습니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만 고민했어요. 링거액을 다 맞고도 바늘을 꽂아 놓으면 피가 역류한다고 해서 투여 속도를 높이고 간호사가 들어오지 않길 기도했어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를 한 달 동안 모으기도 했지요."

―그래서 먹었나요?

"당시 6인실에 있었는데 어느날 약이 사라졌더군요. 옥상에도 수차례 올라갔어요. 그때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동생들이 눈에 밟혔어요. '엄마도 없는데 내가 죽으면 손가락질 받진 않을까….' 나는 왜 죽는데도 이렇게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은지 갑갑했어요."

―썩은 팔에 인조 팔을 달았지요.

"저는 그걸 '헐크 팔'이라고 불렀어요. 뼈도 듬성듬성 있고 혈관도 하나 만들어 넣었지만 감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 팔이 안에서 다시 썩기 시작했어요."

―그래서요.

"입원 당시 팔을 잘라야 한다고 했던 나수균 교수를 찾아가 '팔을 다시 잘라 달라'고 부탁했어요. 교수님은 '그간 고생이 아깝지 않으냐'며 말렸어요. 한 달을 쫓아다녔어요."

―결국 절단 수술을 했나요.

"2000년 3월이었어요. 의사 선생님께 '예쁘게 잘라 달라'고 했어요. 수술 전날 간병하던 여동생이 사진기를 가져왔어요. 팔이 있는 마지막 모습을 찍은 겁니다."

―수술 후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 이제 끝났다, 투병생활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곧바로 퇴원했습니까.

"그해 6월 퇴원 전까지 2차례의 수술을 더 했어요. 자른 부위가 썩어 다시 뼈를 깎고 썩은 살을 잘랐어요."

―빚을 졌나요.

"남은 건 보험회사에서 받은 합의금 1억원과 2급 장애뿐이었어요. 치료비가 1억6000만원 나왔는데 제가 내야 할 돈은 5000여만원이었어요."

―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그 후 연락이 왔나요.

"오빠가 찾아가 주먹질을 하고 왔어요. 그런데 그분도 가진 게 너무 없었대요."

―억울했겠군요.

"'어떤 놈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도 평생 짐을 지고 살아갈 것 아니겠어요? 차라리 한 사람 더 살린다는 셈치고 안 만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팔 없는 세상은 어떻던가요?

"식당엘 갔어요.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앞자리에 있던 커플이 그래요. '저 여자는 한 손으로 똥 닦고 그 손으로 밥 먹나?' 충격이었어요. 병원이야 다 같은 환자들이라 괜찮았는데 바깥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퇴원 후 변씨에게 안 목사는 "원목실에 남아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변씨는 남기로 했다. 2000년 6월, 그가 26살 때의 일이다. 전에 가졌던 꿈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였다. 팔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하고 싶었다.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민하(民賀)라고 지었다. 본인들이 그러하듯 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라는 뜻이다. 민하는 모처럼 신이 났다. 첫 번째 촬영에서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지 못해 두 번째 촬영을 했을 때는 남산으로 '소풍'을 간 것이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만남

안씨는 2000년 7월 변씨가 퇴원한 지 한 달 후 퇴원했다. 4년 뒤인 2004년 그에게 다시 '척수공동증'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사고로 인한 합병증이 생긴 것이다. 척수공동증은 척추 신경이 손상돼 전신이 마비되는 희귀병이다.

그해 안씨는 다시 수술을 받았다. 완치가 목표가 아니었고 오로지 통증을 줄이는 게 목적이었다. 그는 지금도 왼쪽 손등을 제외하고는 몸 전체에 감각이 없다. 앞으로 한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

―사는 게 참 힘듭니다.

"중2 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당시 형은 군대에, 누나는 돈 벌러 객지에 있었어요. 못 박는 것부터 기왓집 수리까지 제가 다 했어요. 어머니에게 저는 남편이나 다름없었어요.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형과 누나는 몰라도 저는 알았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했습니까.

"오히려 생활력은 강해졌지요."

―사고 후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어요. 내 몸 하나 건강하기만 하면 어디서 뭘 하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 후 '이제 휠체어 타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났어요."

―그런데도 변미형씨가 눈에 들어왔나요.

"첫눈에 반했지요. 이목구비가 뚜렷했습니다. 오랜 시간 같이 지냈지만 제가 외모가 됩니까, 말발이 됩니까, 그렇다고 유머가 있습니까. 돈도 없잖아요. 아내가 인기가 많아서 환자와 병문안 온 지인들로부터 고백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아는 것만 열 명 가까이 돼요."

―아내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던가요.

"팔을 자르느냐 마느냐의 순간인데요, 모두 퇴짜를 놨지요."

―어떻게 아내의 마음을 얻었나요.

"저 역시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기에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요. 그저 꾸준히 지켜보고 필요한 것을 아버지와 같은 입장으로 채워주자고 마음 먹었지요."

―싸우기도 했나요.

"죽겠다며 과자 부스러기만 먹고 2년간 단식을 하는 아내에게 따끔하게 충고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신마비인 제가 하는 충고를 아내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을 거예요."

―병원 원목실에서 변미형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연극을 만들었다지요.

"원목실의 장영희 전도사님이 아내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재로 대본을 썼어요. 환자 열댓 명으로 연극팀을 만들었습니다. 암환자도 있었고 시한부 환자도 있었어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보자는 뜻이었지요."

―물론 그 연극팀에 포함됐겠지요.

"아내가 극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저는 조명을 담당했어요. 사고 전 아내 모습을 위해 제가 석고로 팔 모형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요."

이들의 연극은 입소문이 났다. 2006년까지 교회, 병원, 교도소, 요양원 등을 돌며 200여회 가까이 초청 공연을 했다. 2002년 첫 공연 때 특별한 손님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변씨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타고 가다 트럭에 받혔다. 목뼈가 부서지고 팔다리가 골절돼 순천향대 병원으로 왔다. 병원에 입원하며 술을 못 마시게 된 아버지는 오히려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듣다 보니까 네 얘긴 것 같구나"라는 말에 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시 안 목사의 부탁으로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던 이성수 감독이 10여명의 탈북자를 데리고 왔다. 목숨을 걸고 죽을 고생을 했던 탈북인들은 웬만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변씨의 기구한 사연에 그들은 눈물을 훔쳐야 했다.

―연극이 두 분이 결혼하게 된 계기가 됐나요.

"2003년 5월 24일 결혼했습니다. 안영덕 목사님 주례로요. 병원 강당에 환자와 보호자 200여명이 모였어요."

―결혼 한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췌장암 말기였어요. 제가 퇴원한 지 6개월 만에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해 병원에 갔더니 늦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병원에는 왜 남게 됐나요.

"다친 몸으로는 할 일이 없겠더라고요. 2008년부터 월급을 받았는데 그전까지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했어요. 아내는 환자들을 돌보고 저는 교회 음향, 조명, 컴퓨터 작업, 회계 일을 하지요."

―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요.

"아내와 제 월급이 각각 100만원씩, 제가 받는 산재생활보조비까지 합치면 300만원쯤 됩니다. 아이가 하나여서 먹고사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아요."

■"아빠, 오늘도 똥 누는 날이야?"

부부는 야행성이다. 통증으로 밤새 뒤척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 보니 늦잠 자는 게 버릇이 됐다. 오랜 투병으로 체력도 떨어졌다. 피곤하면 일을 하다가도 원목실과 교회 한쪽에 누워 쉰다. 딱히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진 않다.

원목실 직원인 변씨는 하루 2∼3시간씩 병실을 돈다. 주로 중환자실에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찾는다. 원목실에 있을 때도 변씨를 찾는 전화벨은 끊이지 않는다. 한번 친분을 쌓은 환자들이 상태가 위급해지면 가족보다 변씨를 먼저 찾는다.

그는 "몸이 아프면 옆에 가족이 있어도 외로워진다"며 "어린 시절 상처부터 평탄치 않았던 가정사까지 소소히 말해주는 환자들을 심리적으로나마 위로해 준다"고 했다. 죽을 용기도 없고, 살 소망도 없을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사들을 불러 환자들의 머리를 깎고 감겨주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는 "이 때가 보호자들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라며 "경계심이 많은 환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라고 했다.

결혼 이듬해 부부는 아들을 얻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둘 모두 순탄치 않은 성장과정으로 좋은 아빠,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안씨가 혈육에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되지 않았던 이들은 약물 주사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 6살 난 아들을 돌보는 건 남편의 몫이다. 오후 2시쯤 유치원에서 아들이 돌아오면 원목실 교회에 데려가 아들도 보고 교회 일도 한다. 부부는 2007년까지는 보수를 받지 않고 원목실 일을 도왔다.

아이가 입을 뗀 뒤 처음 한 말은 "엄마, 팔 왜 이래?"였다고 한다. 하반신 감각이 없어 요의(尿意)를 느끼지 못하는 남편은 아내보다 생리대를 더 많이 쓴다. 괄약근을 조절할 수 없어 언제 변이 샐지 모르기 때문이다.

2∼3일에 한번씩은 집에 있다. 장운동을 시켜 주는 약을 먹고 대변을 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면 아이가 묻는다. "아빠, 오늘도 똥 누는 날이야?"

"저는 솔직하게 말해줘요. 엄마, 아빠는 사고를 당해서 몸이 불편하다고요. 요즘엔 또래 애들이 뭐라고 놀리면 '우리 엄마 차 사고 나서 팔 잃었다. 너희도 차 조심해'라고 아들이 먼저 말해요."

서로의 팔과 다리가 되어

"너무 잘 만난 커플입니다. 항상 함께 다니면서 신랑은 신부의 없는 팔이 되어 주고, 신부는 신랑의 있긴 있지만 무용지물인 다리가 돼주세요."

안영덕 목사의 주례사에 하객들이 웃었다. 안 목사는 1998년 1월 순천향병원 원목실에 부임하면서 이들 부부를 알게 됐다. 11년 넘게 곁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부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목사는 아내 앞에서도 "우리 셋은 피 섞인 가족보다 진한 관계"라고 말한다.

"둘 다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직설적인 안씨가 '팔 그거 그냥 자르지 뭐 하러 달고 다니냐'고 툭 내뱉으면 '네 팔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변씨가 대드는 식이에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같이 사는 거 보면 둘 다 제일 힘든 시기에 만나 싸우면서 정이 든 거 아닌가 싶어요."

안 목사의 원목실 일을 돕기 위해 퇴원 후 변씨가 남았고, 변씨를 좀더 보기 위해 병원을 맴돌던 안씨도 결혼을 하면서 목사를 돕고 있다. "하나도 특별할 거 없다"며 끝까지 취재를 거부하던 부부를 설득시킨 것도 안 목사였다. 부부가 함께 주연과 조명을 맡았던 연극 이름도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