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② [무사들의 혼이 담긴 땅]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듯 아름답게 솟아 있는 금산(錦山·681m) 주봉의 왼쪽 대장봉(大將峯) 벼랑 아래 독수리 둥지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암자가 바로 그 유명한 기도 도량 보리암(菩提庵)이다.
보리암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세웠다. 보리암이 자리 잡은 터는 금산의 정맥이다. 겉보기에만 위태로울 뿐 절대 흔들림이 없다. 별 넷을 단 대장처럼 위엄과 기상이 넘치는 돌 봉우리다.
보리암과 대장봉을 뭉뚱그리면 선인대좌(仙人大坐)의 형국이다. 천계(天界)의 신선(神仙)이 내려와 남해를 굽어 살피는 꼴이다.
평일에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리암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허전하거나 간절할 때 조상의 묘를 찾듯 보리암에 들러 염원하는 이들은 한 가지 소원만큼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
시원스런 다도해가 한 눈에 펼쳐진 보리암. 나그네는 절경에 말을 잃었다. 절경은 침묵이요, 침묵은 절경이라. 바다 쪽으로 한 눈에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유구한 삼층석탑이 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의 허황옥 공주가 월지국(月支國), 즉 인도에서 배로 실어온 파사석(婆娑石)으로 세운 탑이다. 귀국하면서 배의 바닥에 깔았던 돌이다. 허 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가 뱃길을 막자, 태후는 배에 파사석을 실었고 덕분에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절절한 러브스토리 지닌 상사암
파사석으로 만든 보리암 삼층석탑은 그래서 진풍탑(鎭風塔)으로도 통한다. 닭 벼슬의 피를 파사석에 떨어뜨리면 굳지 않는다.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 영기(靈氣)를 잔뜩 머금은 돌이다.
영석(靈石) 탑답게 삼층석탑은 과학 상식을 비웃고 있다. 탑의 기단석(基壇石) 위에 나침반을 놓으면 침(針)이 요동을 친다. 실험 삼아 탑의 남서쪽 귀퉁이에 나침반을 놓아 보았더니 남쪽을 가리켜야 마땅할 남침이 어처구니없게도 북쪽을 향했다. 위쪽 돌에 올려놓으면 아예 고장이라도 난 듯 나침반은 멈춰 섰다. 보리암 삼층석탑은 인간에게는 불가사의(不可思議)다.
금산 신령(神靈)은 깎아지른 보리암벽에 차(茶)를 심었다. 이름하여 ‘암차(巖茶)’다. 보리암 낭떠러지 위에 자라는 차나무에서 딴 차다. 원효, 조선 태조 이성계, 사명대사 등 금산과 인연이 있는 한국사의 스타들이 예외 없이 맛본 차다. 득도와 건국을 도운 차다.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따는 찻잎인지라 암차의 기성(氣性)은 여느 차와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탁월하기만 하다.
보리암 절벽을 등지고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근래작이다.
미산(美山)답게 금산은 러브스토리도 품고 있다. 상사암(相思巖)의 사연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더욱 절절하다. 주인집 딸을 짝사랑하여 홀로 애를 태우다 죽어 구렁이가 돼버린 머슴. 이 구렁이는 주인집 딸을 친친 감은 채 풀어주지 않았다. 딸의 부모는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굿을 했다. 불가항력으로 구렁이는 딸에게서 떨어져 나와 벼랑 아래로 투신, 자살했다. 화풍병(花風病), 즉 상사병으로 죽은 이 머슴 구렁이는 요즘 일종의 매파신(媒婆神) 노릇을 하며 대리만족하고 있다. 상사암에 올라 사랑을 기원하면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금산을 추파나 던지는 미인계(美人計) 산으로 여긴다면 실수다. 금산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호국지색(護國之色) 쯤이 적절하다. 금산 38경 중 으뜸인 제1경이 바로 정상의 봉수대(烽燧臺)다. 왜구(倭寇)의 침입을 가장 먼저 체크한 조선시대 땅끝 마지막 망대(望臺)가 금산 봉수대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경계경보를 발령하며 이 나라의 남단 최전방을 지켰다.
금산은 이 땅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단군왕검의 영토다. 그런데 금산에는 ‘부소바위’라는 게 있다. 진시황의 아들 부소(扶蘇)가 유배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아들 20여 명 중 첫째가 부소다. 동생들과 달리 아버지가 하는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걸핏하면 반대하다가 중국 북쪽으로 보내져 평생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그렇다면 금산에 있는 부소바위는 무엇인가. 진시황이 장남 이름을 하필이면 ‘부소’라 짓는 바람에 빚어진 오해일 따름이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에서 ‘중국 것=좋은 것’이었다. 모화(慕華)에 빠진 채 제 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비하했을 지경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中原)’이고 나머지는 죄다 오랑캐인데, 개중에서 비교적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족속이 동이(東夷)였다는 게 중국 생각이다. 중국의 동쪽에 살고 있는 오랑캐들, 이것이 ‘동방예의지국’에 숨겨진 정체다. 우리 역사는 모르면서 중국사는 정사에서 야사까지 두루 꿰고 있는 지식인들이 과거 왕조시대에는 많았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는 송악산이 있다. 송악산의 옛 이름은 부소산이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도 부소산이 있다. 부소는 ‘풋소’의 한자 표기다. 풋소는 ‘소나무’를 뜻하는 옛말이다. 금산 부소바위에 관한 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산 이름뿐 아니다. 단군의 둘째 아들 이름 또한 ‘부소’다. 결국 부소바위는 애초부터 우리 것이었다.
금산과 진시황이 하등 무관한 것은 아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던 진시황은 서불(徐市)을 인솔대장 삼아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바다 가운데 있는 삼신산(三神山), 오늘날의 금산으로 파견했다. (‘市’는 ‘시’가 아니라 ‘불’로 소리 낸다. ‘앞치마 불’ ‘사람이름 불’이다)
그러나 금산 어디에도 불로초는 없었다. 서불은 제주도로 갔다. 진시황의 명령을 이행 못한 터라 귀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불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비롯됐다. 성철 스님은 서불과 함께 금산으로 온 일행을 동남동녀 각 3000명, 모두 6000명으로 봤다. 동시에 서불의 야욕도 간파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 처녀 총각 6000명을 이끌고 남해 섬에 정착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생전의 스님은 또 “서불이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다”고 귀띔했다.
◇남해의 짙은 기운, 걸출한 무관들 배출
금산, 그 중에서도 보리암 기도는 효험이 확실하다. 특히 공직이나 관직에 꿈을 품고 보리암에서 기도하면 뜻을 이루는 수가 많다. 근대 인물로 거물급 공직자 중 최치환이 좋은 본보기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서 태어난 최치환은 ‘금암(錦巖)’이라는 아호를 쓸 정도로 금산을 사랑했다. 6·25전쟁 때 영남의 최후 방어선 군경 합동 총사령관으로 나라를 지켰다. 경찰 고위직과 공보실장(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지위), 대한축구협회장, 경향신문사장, 국회의원(5선) 등을 역임했다. 남해와 육지를 잇는 남해대교 건설을 추진했고, 112 범죄신고 전화도 그의 작품이다. 필자의 왕고모 할머니가 남해의 최씨 집안으로 출가, 금산 보리암에서 치성을 올려 얻은 아들이 바로 최치환이다.
남해 출신의 무관(武官)들이 출중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남해는 거제, 제주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유배지였다. 승승장구하다 꺾인 인걸들의 회한이 짙게 밴 탓에 남해인의 기운은 매우 센 편이다. 강한 기(氣)가 양(陽)으로 작용한 결과가 전국 제일의 향학열과 무병장수다. 국내의 폭력조직은 물론 일본의 야쿠자 중에도 남해 태생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금산 음(陰) 기운의 영향이다.
태백성(太白星), 즉 금성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새벽녘이나 오후 3~7시에 금산 보리암에서 기도를 올리면 양기(陽氣)를 흠뻑 취할 수 있다. 점심시간대나 심야는 피해야 한다. 불기운이 강할 때라 쇠기운(金氣) 덕을 봐야 하는 기도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조폭의 우두머리를 원한다면 모를까.
결국 금산의 영험한 기도 효과는 지맥을 능가하는 무사들의 인맥이 응축된 영기(靈氣)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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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26호(4월20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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