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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① [음양의 조화가 빚어내는 영암산]

화이트보스 2009. 7. 26. 20:15

월출산① [음양의 조화가 빚어내는 영암산]

【【서울=뉴시스】 영암에서 바라본 월출산./뉴시스 아이즈
월출산은 일찌감치 호남(湖南)의 5대 명산으로 꼽혔다.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주저하지 않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명산. 그러나 월출산을 눈으로만 본다면 달의 한 면만 훑고 달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발상지가 바로 월출산이며, 백제의 왕인박사와 고려의 도선국사를 배출한 걸출한 국사(國師)의 땅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엔 높고, 수려하고, 오묘하고, 장대한 산맥이 지천인데 왜 하필 말단인 아담한 월출산에서 한국과 일본의 건국 운을 튼 국가의 대스승이 탄생했을까. 나그네는 강력한 영(靈)적 에너지에 이끌려 달의 뒷면에 숨겨진 비밀을 훔쳐보는 양 대보름달의 안내를 받으며 남도로, 남도로 향했다.

월출산(月出山)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솟아 있다. 소백산맥의 끝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영산강을 낀 너른 들판에서 갑자기 용솟음친 평지 돌출산이라 체감 위용은 상상 이상이다. 강과 바다, 들판과 산이 동시에 보이는 최고봉인 천황봉(해발 809m)을 비롯해서 구정봉(738m), 장군봉(510m), 향로봉(743m), 도갑산(375m)으로 이어지는 산 전체가 기괴한 암석으로 장식되어 경탄하는 이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 시대를 떠나 '달이 뜨는 산'으로 유명

월출산은 이름에서부터 음기가 충만한 달과 같다. 백제와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적엔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리다 조선 시절부터 월출산으로 굳어졌다. 시대와 명칭을 막론하고 월출산은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산’이 아닌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산들이 흙으로 이루어졌지만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월출산은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만들어진 돌산으로 힘이 넘친다. 스카이라인에 걸친 바위들은 울퉁불퉁한 톱날처럼 뾰쪽해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화기(火氣)가 팽만한 남자의 산, 또는 양기(陽氣)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월출산은 이름에서부터 달이다. 여성을 상징하면서 음의 극점이다. 그런데 월출산은 단단한 바위산이다. 여기에 월출산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단단한 양기의 암석이 불꽃처럼 부드럽게 여성적으로 빚어짐으로써 상극의 음양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절묘한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이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오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이 기운이 바로 월출산의 보이지 않는 뒷면이다.

산세(山勢)를 보자. 월출산은 정상인 천황봉과 구정봉을 연결하는 동서축과 같은 능선을 경계로 해서 북쪽인 영암과 남쪽인 강진의 산세는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영암 쪽의 산세는 너무 기가 세고 자못 웅장하여 무인적인 양의 기질이다. 이와는 반대로 강진 쪽의 부드러운 곡선미와 푹신한 흙산은 순탄한 산세로 문사적인 음의 기풍을 보여준다. 하나의 산이 음과 양을 동시에 품고 있다.
아래서 올려보면 남성이요, 위에서 내려 보면 여성이다. 남성처럼 굳고 꼿꼿하게 돌출한 사자봉(獅子峯) 등 바위 봉우리에 압도당하다가도, 억새밭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금세 포근해진다. 구정봉 주변 봉우리들은 오밀조밀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월출산은 역(易)의 괘(卦) 가운데 하나인 지천태(地天泰)를 몸으로 입증하고 있다. 심지어 멀리서 보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기만 한 천황봉마저도 정상에 오르면 딴판이다. 300여 명은 족히 앉을 만큼 넓은 반반한 바위가 갈려있어 안방처럼 넓기만 하다.

월출산은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산이라서 항상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산의 정상에 그것도 바위에 구멍을 뚫어 물을 머금고 있으니, 절구통 모양의 아홉 개 천연우물이란 의미로 구정봉(九井峯)이라 부른다. 이 바위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외양뿐 아니라 수화(水火)의 기운도 조화를 갖추었으니 명실 공히 음양을 모두 갖춘 산이 아니겠는가. 월출산은 적나라하게 이를 눈앞에서 증명한다.

구정봉으로 가는 길에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야수와도 같은 형상을 한 베틀굴이 나타난다. 이 굴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란한 여인들이 베를 짠 곳이다. 굴속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여성의 음부 형상 바위가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음수굴, 음혈(陰穴)이라고도 부른다.

바람재를 지나 천황봉으로 향하던 나그네는 우뚝 솟은 대물 남근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베틀굴을 마주보며 팽팽하게 서있는 모습이 너무도 남자의 급소를 닮은 모습이고, 돌의 중심부에는 깊은 골이 파져있고, 이층건물 높이의 남근석은 실제의 모양을 크게 확대한 모습 그대로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보는 이마다 경탄과 함께 자연의 조화에 갈채를 보내지 않는 이가 없다. 남근석 위로 돌을 던져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서로 던진 작은 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월출산 음양(陰陽) 조화의 극치미는 베틀굴과 남근석(男根石)을 지나 합체석에서 절정이다. 조금 더 가면 낯이 붉어지는 기암괴석이 떡하니 길을 막는다. 이름하여 ‘여근남근 합체석’. 그래서인지 베틀굴 바로 위 구정봉의 웅덩이 9곳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전설에는 ‘월출산 구림 마을의 동차진이라는 남자가 구정봉에서 하늘을 깔보는 언행을 하다 옥황상제에게 벼락을 아홉 번 맞고 죽었다’고 돼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 실토한 동차진 영가(靈駕)의 진실은 달랐다. 어리고 젊은 처첩을 아홉이나 거느리고 이곳에서 방탕한 짓을 벌이다 날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주위 풍광은 곧 도원경(桃源境)이요,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니 돈 많은 한량이라면 능히 침소를 벗어나 자연의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 했음직하다.

◇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 가득

음양의 두 바위가 서로 사랑에 빠져 월출산의 수많은 석상들을 낳았다. 월출산의 기암 중에는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바위, 입맞춤하고 있는 사랑바위, 아기를 가진 배부른 임신부바위, 단란한 모습의 가족바위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이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산수경석(山水景石), 물형석(物形石), 무늬석, 색채석(色彩石), 추상석(抽象石), 전래석(傳來石) 등이 구석구석에서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찌나 그렇게 부처의 얼굴을 닮은 바위는 유난히도 많은지…. 월출산의 별명 중 하나가 천불산(千佛山)임에 무릎을 치게 된다. 여기에 기기묘묘한 소나무까지 보태져 확대한 분재(盆栽)나 다름없다. 오죽했으면 월출산을 기암괴석의 박물관이자 수석(壽石) 전시장이라고 불렀을까.

일본의 어느 거물급 수석(壽石) 애호가는 값에 구애받지 않고 이 땅의 오묘한 자연석을 사들이고 있었다. 한국 산하의 아름다움과 축경(縮景)의 매력을 앉아서 감상하겠다는 심사다. 이런 그가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는 수석이 바로 월출산이다. 산 전체를 최고의 수석으로 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선 월출산이 움직일 수 없는 산이라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월출산은 안개 낀 날이나 달밤에 올라야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달빛에 드러난 기암괴석들의 실루엣이 당장이라도 살아 뛰어나올 것 같은 입체 영화관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라도 월출산일 게다.
음양의 기운이 화창하니 남녀가 만나 뜨거운 물을 분출한다. 월출산 온천의 효험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피로 회복, 신경통, 류머티즘, 알레르기성 피부염, 만성 습진, 심장병, 피부병 등 월출산 온천의 효능은 곧 남녀 간 교류로 치유 가능한 질환 일색이다. 돌의 재질마저 신비한 약효를 지닌 맥반석이니, 한마디로 ‘기똥(氣通) 찬’ 산이다. 과연 풍수지리의 발생지답다.

월출산은 영암(靈岩)이요, 영암이 월출산이다. 기감이 예민한 사람은 월출산을 온 몸으로 느낀다. 월출산을 비추는 보름달과 그 빛을 받은 바위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靈的) 에너지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음양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영기(靈氣)가 충만한 바위산인 월출산을 감히 영암산(靈岩山)이라 부른다.

<여근,남근 합체석>



 월출산②편 [國師의 땅]

천황사지에서 본 월출산. /뉴시스 아이즈

월출산은 여러 가지로 영암(靈巖)의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월출산을 가운데에 보듬고 있는 영암에는 세 개의 흔들바위가 있다. 운무봉에 하나, 구정봉 아래 하나, 그리고 도갑봉에 있다고 했다.
이 땅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은 발본색원 차원에서 월출산으로 숨어들어 바위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그런데 세 바위 가운데 하나가 묘하게도 스스로 처음의 제자리로 찾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 바위를 신령스런 바위라 하여 바위가 있는 산과 함께 고을이름을 영암(靈巖)이라 부른다고 했다.

영암의 서기는 수석만 빚은 게 아니라 인간도 영험하게 빚었다. 4세기말만 해도 일본 열도의 왜(倭)는 백제 해상왕국 연방 중 하나였다.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은 백제는 일본 열도 남부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백제의 본격적인 일본 열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에 태자 전지를 보내 백제의 안전을 도모했다. 왜왕은 13대 근초고왕의 왕명으로 왜 왕실에 머물고 있던 아직기(阿直岐)로부터 국사(國師)의 필요성을 듣고 본토(백제)에 훌륭한 학자를 청하게 된다. 아직기는 한 인물을 천거한다.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32세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인(王仁) 박사다.
왕인 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文山齋)에 입문해서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는 왕인 박사

왕인 박사는 일본에 혼자 건너간 게 아니다. 경전뿐 아니라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였다.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열도 곳곳에 왕인박사의 신사가 조성되어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근래 들어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일대에 왕인박사 유적지를 복원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월출산 서쪽 산 중턱에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문산재와 양사재(養士齋),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인 ‘책 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를 정화하고 있다. 왕인묘(사당)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매년 양력 4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이번엔 같은 고장에 백제가 아닌 신라출신의 걸출한 국사가 탄생한다. 신라 말, 500년의 고려국운을 점지했고, 풍수도참설을 통해 여전히 지금까지도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도선국사(道詵國師)다. 도선은 탄생 설화부터 범상치 않다. 도선의 아버지는 ‘오이’였기 때문이다.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에서 처녀 최씨(崔氏)가 겨울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은 뒤 배가 불러 낳은 아기가 도선이다.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녀가 애를 낳는 일은 경(墨刑)을 칠 일이었다.
최씨는 신생아 도선을 대나무 숲에 버린다. 그러나 비둘기와 독수리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했다. 갓난아기 도선이 버려졌던 숲은 영암의 구림촌(鳩林村), 즉 비둘기 숲 마을이다. 아기를 뉘었던 돌 이름은 국사암(國師巖)이다. 지금도 영암의 특산물 중 하나가 오이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달통한 반신(半神) 도선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도선은 국토의 모든 산봉우리를 부처로 보았고,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짚었다. 국토 전체를 태평양으로 향하는 배(船)의 꼴로 요약한 것이다. 국토의 산세(山勢)를 살피던 도선은 장차 나라가 변란과 내분으로 평안치 못할 거라고 예감했다.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서 무거운데, 호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나라가 기울어진 까닭이다.

도선은 비방을 쓴다. 월출산에서 조금 떨어진 화순의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에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조성하려한다. 뱃머리에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면 높은 탑은 돛대를 삼고,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선은 즉시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서 터를 다듬어 놓고, 도력(道力)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천상의 석공들은 ‘다음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란 단서를 달고 도선의 청을 받아들인다.

도선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절의 서쪽에 있는 일괘봉(日掛峯)에 해를 잡아 매놓았다. 그런데 심부름을 하던 사동은 일에 짜증이 나자 꾀를 부렸다. ‘꼬꼬댁’하고 닭 우는 소리를 질렀다.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석공들은 그만 지체 없이 모두 천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석공들이 떠난 뒤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지금도 운주사 근처에는 세우지 못한 거대한 부부불이 땅에 누운 채로 와불(臥佛)이 되어있고, 탑과 부처는 흙과 잔돌을 섞어 뭉쳐서 만들다 만 것처럼 거친 석질이며, 일대 돌들은 옮겨지지 않아 불상과 탑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 고려의 500년 국운 보장한 도선국사

사람들은 만약 사동의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거대한 와불이 일으켜 세워졌고, 천불은 사공이 되고, 천탑은 돛대가 되어, 운주사 일대는 큰 도읍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나라가 태평성세가 되었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하지만 도선은 왕건(王建)의 아버지에게 명당 양택(陽宅), 즉 집터를 잡아줬다. 온통 눈 천지가 돼도 왕건의 집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송악(松嶽)을 왕도(王都)로 점찍으며 500년 국운을 보장했다. 왕도만 세운 게 아니다. 산천의 혈맥 곳곳에 절이나 탑을 세웠는데, 이를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도선이 월출산에 세운 절이 월출산 서쪽의 도갑사(道岬寺)다.

도선은 사후에 고려 왕실의 왕사로 모셔졌다. 선종의 한 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지만, 후대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서 더 의미를 두고 있으니, 도선국사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국사로 받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호남출신 도선을 개국의 국사로 모신 왕건이 왜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호남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명문화 했을까. 일각에서는 ‘차령 이남’을 다른 지역으로 해석했거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후대에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독자의 요청에 의해 나그네가 살펴보니, 왕의 정치적 성향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편차가 있긴 했지만, 관리등용이나 고려 국사의 수에서 적어도 고려 때에는 공식적으론 특별한 지역 차별 자취는 찾지 못했다.

후대에서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선의 풍수도참설을 오남용해서 지역 차별에 악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훈요십조의 지역 차별 문구도 그런 악의적 편견의 한 흔적일지 모른다.

나그네에게 지난해 10월 신기한 일이 있었다. 1981년에 처음 뵌 이후 만난 적이 없는 저명한 원로 한 분의 이름으로 귀물(貴物)이 도착한 것이다. 임종 직전, 그분은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평생 모으고 간직하던 소중한 소장품들을 필자에게 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소장품들 중에서 개태사 주장자(柱杖子)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개태사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백제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도선국사의 뜻을 받들어 태조 왕건이 계룡산 아래 창건했다고 한다. 고인은 생전에 개태사 부근 터를 복원하다가 우연히 이 주장자를 발굴했고, 그 주장자는 틀림없이 창건당시 묻은 도선국사의 주장자라 굳게 믿었다고 하니, 유언이 되어서 필자에게 전해진 주장자는 참으로 기묘하지 않을 수 없다.

<구정봉 우물>


 월출산③편 [만물을 생성하는 태반의 땅]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좌상 /뉴시스 아이즈

월출산의 바위들은 절리현상으로 생겼다. 지표가 형성될 때 땅위로 솟아오른 마그마가 식으면서 수축되는 과정에서 위아래로 갈라지는 수직 절리현상이 나타난다. 월출산은 동시에 수평절리까지 발생한 후 오랜 세월동안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지금의 돌밭이 생긴 것이다.

월출산은 금강산(金剛山)이기도 하다. 증산교(甑山敎)의 창시자인 강일순이 산운(山運)을 옮긴 덕이다. 증산은 백두산의 기운을 뽑아 한라산으로 옮겼다. 이어 덕유산에 뭉쳐있는 기운을 뽑아서 무등산으로 옮긴 다음, 금강산의 기운을 뽑아 월출산으로 옮겼다. 백두산에 천지가 있듯 한라산에는 백록담이 있다. 1만2000봉으로 이뤄진 금강산처럼 월출산에서도 1만2000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금강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품은 ‘복제 금강산’이 월출산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은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국보144호)이 있는 산이 월출산이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은 몸의 비례가 해학적이고 선이 투박하여 자연미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사람이 만든 이 인공 석상조차 월출산에서는 자연산 수석 작품이 되었다.

◇ 통천문을 지나 펼쳐지는 신세계

산에 있는 모든 구름다리 중 가장 길다는 월출산의 출렁다리는 길이가 52m나 된다. 120m 높이의 하늘에 매달린 출렁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고 함께 건너가야 한다. 월출산 꼭대기에 오르려면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해야 한다. 등산이 아니라 비상(飛上)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바위 굴을 벗어나면 거기에 달나라, 하늘이 있다.

정상에는 월출산 소사지(小祀址)라는 제단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국가 차원의 천제(天祭)가 올려지던 곳이라는 표지다. 영험하지 않는 곳에 제천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도갑산 아래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고승 원효의 작품이라 전한다. 무위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존재는 본존불 탱화다. 탱화 속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 그 연유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그린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법당 안을 엿봤고, 파랑새는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입에 붓을 문 채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새였다. 그래서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

월출산은 두 얼굴의 별천지다. 영암에서 바라보면 악산(惡山)이다. ‘나쁜 산’이 아니라 ‘산세가 험한 산’이다. 강진 등 해안 쪽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고 순한 모습이다.
영암의 월출산은 돌과 뼈로 그린 동양화 한 폭이다. 흙산은 재물, 돌산은 인물을 허락한다. 영암에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고, 강진 등지가 부호(富豪)를 대거 배출하고 있는 원인이다.

강진의 월출산은 흙이 풍성한 육산(肉山)이다. ‘인물과는 인연이 없어도 부자는 많다’는 게 강진의 자긍 겸 자조다. 천불산(天佛山), 만덕산(萬德山), 억불산(億佛山), 그리고 조산(兆山) 등 어마어마한 돈의 액수가 땅이름으로 굳은 곳이 강진 주변에 유난히 많다.

영암에서 인물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월출산 북쪽의 영암은 바둑황제 조훈현을 낳았고, 남쪽의 강진에서도 바둑의 명인 김인이 나왔다. 조훈현의 바둑은 자유롭고 신묘하다. 김인의 기풍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월출산이 점지한 인걸들의 면면 또한 월출산 두 얼굴의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월출산의 이러한 양면성을 고루 흡입한 인물도 있다. 고려 초기의 문신 최지몽이 대표적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했을 뿐더러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 18세 때 태조 왕건의 해몽 요청을 받고 “장차 삼한(三韓)을 통합해 다스릴 길조”라고 풀었다. 매우 기뻐한 태조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지몽, ‘꿈을 안다’는 의미다.

최지몽은 도선이 태어난 영암 구림(鳩林) 마을 출신이다. 명필 석봉(石峯) 한호도 구림마을에서 글을 익히며 성장했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하며 촛불을 끈 한석봉 어머니의 타이름이 있던 곳도 구림마을이다.

월출산은 음양의 통합된 기운이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문화를 꽃피게 했다. 월출산의 뛰어난 예술성 때문에 국내의 산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예술로 표현되어진 산이 월출산이다.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든 김창조에게 월출산은 예술혼이었다. 이이,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불린 최경창은 월출산 태생이 아니랄까봐 시와 서화, 피리 연주에 능한 예인이었다.

월출산에 올랐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극찬일색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달은 허공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고 월출산을 묘사했다. 고산(孤山) 윤선도는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라며 월출산 선경(仙境)을 가리는 안개를 탓했다.
노산(鷺山) 이은상은 ‘월출산 구정봉(九井峰)이 창검을 들고 허공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천탑도 움직인다. 어인 일인고. 아니나 다를세라 달이 오르네’라면서 무릎을 쳤다. 이순신 장군도 ‘월출산의 명승을 상상하면 이 병란 중에서도 늘 생각이 난다’며 동중정(動中靜)했다.

오이로 잉태한 도선이 땅의 아들이라면, 주몽은 하늘의 아들이다. 예전에 구명시식에 등장한 주몽의 영가(靈駕)는 어찌 들으면 함경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주문이다 싶은 말로 필자에게 ‘월출산의 500년 주기설’을 귀띔했다.

◇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 배출

주몽은 은빛 옷에 금·은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었다. 움직여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머리에 꽉 맞춘 관이다. 주몽의 영가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출현했다. 말발굽·말울음 소리, 몇 백 명이 빠르게 걷는 소리도 들렸다. 신하들은 대부분 무장한 군인이었는데 뜻밖에도 조그만 활을 갖고 있었다. 어른 팔 길이보다 약간 긴 정도였다. 강궁(强弓)이라고 해 엄청 큰 활만 상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주몽은 유독 ‘500년’을 강조했다. 왕인 박사 이후 500년이 흐른 뒤 도선을 등장시켜 한 시대를 풍미하게 했듯이 월출산은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500년 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유명한 풍수가 손석우의 영가도 “월출산에서 황제가 난다. 475년간 계속되는 나라를 건국할 인물”이라며 생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는 인물이 월출산에서 난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손석우는 “음택(陰宅) 명당, 즉 아주 좋은 묏자리가 월출산에 숨겨져 있다”고 강조할 뿐이다. 그렇다고 월출산에 조상을 암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월출산은 속인이 묻힐 곳이 아니다. 이곳은 신선들의 휴양지일 따름이다.

가수 하춘화 덕분에 월출산은 한결 친근해졌다.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은 ‘월출산 아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풍년이 온다.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흥타령 부네. 목화짐 지고 흥겹게 부네.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달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월출산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음과 양이 교합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여성의 자궁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듯, 월출산의 서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인들에게 기암괴석으로 현몽하여 잠시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궁금해 한다. 어떻게 생겼을까, 보이는 세계와 어떤 관계일까 하고 말이다. 혹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다면, 영암의 월출산으로 가보시라.
그 곳에 딴 세계가 펼쳐져 있으니까.

<천황봉 제단>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24호(4월6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