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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승무원이 전한 히로시마 원폭

화이트보스 2009. 8. 4. 19:08

승무원이 전한 히로시마 원폭



미 공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에서 찍은 당시 모습(좌)과 현재의 모리스 젭슨씨(우)의 모습.
"폭격기 창문 밖으로 (지상에서) 버섯구름과 화염이 확산되는 게 보였습니다.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많은 것이 파괴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 공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 모리스 젭슨 씨(87)는 당시의 목격담을 이 같이 전했다.

젭슨 씨는 그러나 "원폭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조치였다"고 강조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3일 젭슨 씨가 밝힌 원폭 투하의 순간과 의미 등을 보도했다.

'에놀라 게이'에 탑승한 병사 12명 중 현재까지 생존한 사람은 젭슨 씨를 포함해 2명뿐이다. 젭슨 씨에 따르면 이들은 원폭이 투하되기 약 2개월 전인 1945년 6월부터 서태평양 마리아나제도의 테니안섬에서 특수 임무 부대원으로 다른 병사들과 격리돼 생활했다고 한다.

젭슨 씨는 "나는 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폭탄이 원자폭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기장(폴 티베트)을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들은 초강력 폭탄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5t 가량의 원폭이 폭격기에서 투하된 순간 기체가 튀어 올랐고 약 43초가 지난 뒤 기체 창 밖으로부터 섬광이 들어왔다"며 "(원폭으로 인한) 폭풍으로 기체가 흔들렸다"고 밝혔다. 잠시 후 충격으로 다시 기체가 진동한 뒤 기장이 기내 통신장치로 승무원들에게 '투하된 것이 원자폭탄'이라고 알렸다고 한다.
젭슨 씨는 적국의 땅 위로 화염이 번지는 것을 보면서 "기쁘지는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피폭자들이 고통을 겪는 것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원폭의 피해가 심각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당시 미군이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을 앞둔 상황에서 "(상륙하게 되면) 미군 병사뿐 아니라 일본군과 일반 시민 대부분이 희생될 것이 명백했다"며 "원폭 투하는 전쟁을 빨리 끝내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원폭 국가로서 미국의 '도덕적 책임'을 언급한 것에 대해 젭슨 씨는 "너무 순진한 발언"이라며 "우리 세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또 오바마 대통령이 사죄의 뜻으로 히로시마 등 일본의 피폭 도시를 방문하면 당시 적국 일본과 싸운 미군의 한 사람으로서 "기분이 매우 나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군은 히로시마에 이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폭을 추가로 투하했다. 2차대전 전범국으로 아시아 각국을 침략해 살상 등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 같은 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이날 한국도 광복을 되찾았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