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은 침묵의 장기다. 간은 다른 장기보다 통증에 매우 둔감하고 염증 등 상처가 나더라도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이 있어 웬만큼 아파도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따라서 간의 문제 때문에 배가 아프고 살이 빠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이미 때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간암의 고 위험군으로 ▲40세 이상 ▲애주가(愛酒家) ▲간 수치가 높은 사람 ▲간염바이러스 보균자를 꼽는다. 이 그룹에 속하는 사람은 간암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정기적으로 간 검사를 받아야 한다.
지난 5일 세브란스병원 '간암 조기진단 클리닉'을 방문한 대기업 부장 고모(47)씨. 그는 체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나, 요즘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소주 2~3병을 가볍게 비우던 주량도 최근에는 확 줄었고 술 마신 다음날에는 직장에 지각을 하기 일쑤다. 이런 그에게 부인이 간암 판정을 받고 몇 달 못 살고 돌아가신 시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간 검사를 받아보자고 졸랐다. 회사에 월차를 내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은 고 씨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 ▲ 세브란스병원 제공
- ▲ 세브란스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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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4층 소화기병센터 안의 간암조기진단클리닉. 문을 열고 들어가 예약날짜와 이름을 말하고 잠시 기다렸다. 문 앞에는 고씨처럼 간 검사를 받으러 온 남성 3명이 앉아있었다. 5분 뒤 고씨와 마주 앉은 의사는 문진(問診)을 시작했다. 술은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가족 중 간질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문진을 마친 뒤 채혈실에서 피를 뽑고 다시 클리닉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복부초음파 검사. 의사는 배에 윤활유를 바른 뒤 화면을 보며 하얀 막대기로 배 이곳 저곳을 눌렀다. 검사는 아프지 않았고 10분 만에 끝났다.
클리닉의 담당 직원은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2시간쯤 걸린다고 했다. 고씨는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내와 병원 부근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간 검사 때문에 전날 저녁부터 금식 했는데도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혹시 B형이나 C형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아닐까, 암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오전 11시30분 클리닉에서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박준용 교수가 고씨와 마주 앉았다. 박 교수가 피검사 결과를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 고씨가 먼저 "선생님 간암은 없지요?"라고 물었다. 박 교수는 웃으면서 "간암 여부를 알아보는 혈청 알파피토단백(AFP), 프로트롬빈 면역검사방법(PIVKA-2)수치 모두 정상이고, B·C 형 간염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간 수치는 문제가 있었다. 검사 결과지를 보니 SGOT는 52IU/L, SGPT는 113IU/L로 나와 있었다. SGOT는 13~37IU/L, SGPT는 7~43IU/L가 정상이다. 초음파 검사 결과에서도 문제가 나타났다. 박 교수는 "간이 다른 사람보다 하얗고 부어있는 편입니다. 지방간과 약간의 간염이 의심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간에 염증이 진행된 상태이므로 간이 딱딱해진 정도를 알아보는 간 섬유화 스캔을 찍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간 섬유화 스캔을 받기 위해 초음파 검사 때처럼 배를 걷고 누웠다. 검사를 맡은 간호사는 오른 팔을 위로 올리라고 한 뒤 고 씨의 배위에 막대기를 10번 정도 붙였다 뗐다 반복했다.
고씨가 옷을 매만지고 다시 클리닉으로 돌아가자 박 교수가 간 섬유화 스캔 결과를 들고 왔다. 그의 간 섬유화 정도는 6점. 가장 위험한 상태인 10점에 비하면 섬유화가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간의 조직 손상이 이미 시작된 상태라고 박 교수가 말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의 검사 결과를 종합해 간암 예측결과를 말씀드리면 간암에 걸릴 확률은 7%로 간암 위험군 중간그룹"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술을 줄이고 6개월 후 다시 병원에 오시라"고 말했다.
고씨가 "얼마 전부터 기력을 보충하려고 먹기 시작한 칡즙을 먹어도 되는지 묻자 박 교수는 "성분을 정확히 잘 모르는 식품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 씨는 "암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의사선생님 말씀처럼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말했다.
박준용 교수는 "간암 진단을 받는 사람의 55~60%는 수술조차 불가능한 간암 말기 환자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위험도에 따라 미리 검사를 받으면 간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40세 이상이면서 주 3회 이상 술을 마시고 간염을 가지고 있으면서 간 수치까지 높은 간암 고 위험군은 3개월 간격으로, 이 네 가지 요소 중 세 가지만 가지고 있는 중간 위험군은 6개월 간격, 한 두 가지만 가지고 있는 저 위험군은 1년 간격으로 검사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간이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만 하지 말고 일단 검사를 받아봐라. 간경화나 암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다. 반대로 고씨처럼 '나는 간이 튼튼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사람도 간암 고위험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외과 김경식 교수는 "간암은 증상이 없기 때문에 진단 시기가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 초기일 때 발견해 수술할 수 있는 20% 안에만 들어도 완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