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추석날 맞았던 서울 수복

화이트보스 2009. 9. 28. 10:14

추석날 맞았던 서울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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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9.27 22:06 / 수정 : 2009.09.27 23:04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1970년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고 대통령이나 장관들은 참례를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드골은 "단, 2차 세계대전 전쟁터를 함께 누비며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던 전우들의 참례는 허락해도 좋다"고 했다. 드골의 후임 대통령과 장관들은 장례식엔 못 가고 장례식 식순에 맞춰 각자 사무실에서 묵념을 했다. 드골은 간소한 장례를 원했으면서도 나치에게 점령된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함께 총을 잡았던 전우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잊지 못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수도 파리 입성(入城)으로 이어지는 2차대전 때 프랑스 해방 과정은 6·25 전쟁 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월 28일 서울을 인민군 치하로부터 해방시킨 과정과 닮았다. 북한의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잃고 낙동강까지 밀린 지 89일 동안, 돌아가기 힘든 서울은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당초 서울 탈환작전 선발대에서 한국군은 제외돼 있었다. 한국군의 참여는 인천상륙작전 때 한국 해병대의 활약상을 인상깊게 본 맥아더 사령관이 알몬드 미 10군단장에게 "서울 선두 입성은 한국 해병대에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소" 제안했고, 알몬드가 이를 받아들여 이루어졌다(정일권 회고록). 9월 22~25일 서대문 밖 연희산, 안산 일대의 '연희고지 전투'는 서울 탈환작전의 최대 고비였다. 한·미 연합군은 500여명, 북한군은 25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27일 새벽 3시 한국 해병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와 두 명의 병사는 포연 자욱한 태평로 세종로를 뚫고 중앙청으로 향했다. 어렵사리 구한 태극기는 웬만한 책상보다 컸다. 세 사람의 혁대로 밧줄을 만들어 중앙청 중앙 돔에 올라가 돌로 된 기둥에 태극기를 게양한 게 새벽 6시 10분. 때마침 추석날이어서 휘영청 달빛 속에 물든 태극기는 시민의 가슴에 더 사무쳤다.

이명박 대통령이 엊그제 방문해 헌화한 미국 피츠버그시의 6·25 참전용사 기념비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피츠버그의 6·25 참전용사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렀던 전우들 희생이 잊혀져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외부 도움 없이 8년 동안 120만달러를 모아 세웠다. 오늘이 서울 수복 59주년 기념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그때 그 달빛에 물들어 휘날리던 태극기를 여태 가슴에 품고 사는 시민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