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물 - 정승이 된 삯바느질집 아들 정운찬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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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선생 좀 모시고 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리나라에 그만한 재목이 없어. 그 양반, 먹물 좀 빼서 나랏일을 맡게 해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백성들이 발 뻗고 살 수 있을 것이네.”
2007년 초, 조계종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원로스님(진경)이 모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서울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교단으로 돌아와 경제학을 가르치던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이런 뜻을 전했더니 나중에 내려갈 일이 있을 때 시간을 잡아보자고 했다.
두세 달이 흐른 그해 4월30일, 정 후보자가 대선 출마의 뜻을 접은 뒤 이 일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정 후보자가 그분을 뵈러 가자고 했다.
유서 깊은 암자로 이어지는 산길은 멀고 험했다. 계절은 벌써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 있어 땀을 뻘뻘 흘리며 계룡산을 올라갔다. 서로 예를 표하고 녹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먹물을 좀 빼주겠다”고 장담했던 큰스님의 입에서는 덕담 이외의 훈계가 나오지 않았다. 왕복 여덟 시간. 길 위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하루가 걸린 장거리 여행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총장님, 괜한 걸음을 하신 것 같습니다.”
“모처럼 여행 잘 했잖아요? 좋은 말씀도 듣고…. 거기다 한번 찾아 뵙겠다는 약속도 지켰고요.”
정 후보자는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소한 모임이라도 나는 그분이 약속 장소에 늦게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작은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큰 약속도 가볍게 여기기 십상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시간관념이나 남에 대한 배려가 어려서부터 몸에 뱄기 때문이다.
특정한 가치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 거창한 좌우명이나 영리한 처세술을 멀리하는 그가 좋아하는 말은 ‘Dictum Meum Pactum’.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옛 런던증권거래소 빌딩 벽에 새겨진 짤막한 글귀로 ‘내 말은 곧 문서’라는 라틴어다. 철저한 신용과 신의가 생명인 금융·자본시장이 영국에서 처음 싹트고 활성화한 것은 각자의 말 한마디가 증권 이상의 효력이 있고, 국가 간의 조약처럼 중히 여긴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약속과 원칙을 소중히 여긴다. 이익이 되면 지키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약속이 아니다. 약속은 상대방과 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나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돌아본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 이렇게 썼다.
“한 국가 혹은 정부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효율성·투명성·객관성과 같이 정책이 갖추어야 할 속성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꼽으라면 나는 일관성을 들고 싶다.”
▶▶▶세계적 명품도시
이처럼 신념과 소신이 투철한 그가 왜 총리로 지명되는 날 충청남도 공주와 연기-그의 고향 근처에 건설되는 세종시 프로젝트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메가톤급 화두를 던졌을까?
“세종시 건설은 충청권의 표심을 겨냥한 지역사업을 넘어 국가적 이익이 걸린 기간사업이다. 경제학자 신분일 때 원론적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세종시 프로젝트를 원안보다 축소하거나 왜곡·변질하자는 뜻이 아니라 경제적·지역균형적·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 원안의 취지를 확대 발전시키자는 뜻이므로 정책의 일관성은 물론 효율성·타당성 등 모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제안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수도 역할을 하는 제네바는 ‘평화의 수도(Peace Capital)’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 외교·금융의 중심지로 돈과 사람이 넘치는 글로벌 허브의 상징이다. 정 후보자의 복안은 요컨대 노무현 정부가 6,000만m2의 터에 과일을 담아주려 했다면, 정 후보자의 구상은 대를 물려가며 따먹을 수 있는 과일나무를 심자는 것이다.
“공주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초겨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무작정 상경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곳이다. 세상에 고향을 발전시키자는 데 발목을 잡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총리직을 수락한 이유 가운데는 세종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정 후보자의 생애 첫 기억이 시작되는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는 북동쪽에 계룡산이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탄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농촌. 세종시 예정지까지는 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이웃마을이다. 정부수립 이후 제40대 총리로 지명되기 이전에도 정 후보자는 역대 정권에서 여러 번 출사를 권유받았을 만큼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프린스턴대 경제학박사에 컬럼비아대 조교수, 도쿄(東京)대 총장자문위원, 임기를 마친 서울대 최초의 직선제 총장…. 언론은 이런 그를 잠재적 대통령 후보로 꼽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 후보자에게는 노골적인 욕심이 없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의 꿈은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 서울대 신입생 때 경제학회에 들어가려고 면접을 보면서 장래 희망을 묻는 선배에게 바로 이 대답을 했다 “너무 소시민적”이라고 타박을 받았을 만큼 소박한 소망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입주과외를 시작한 뒤 난생처음 도시락이라는 것을 가져갈 수 있었던 소년에게는 사실 무슨 거창한 삶을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허황한 사치였다. 그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매사에 긍정적 태도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런 그의 삶과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고향 - 6·25가 일어난지도 몰랐다는 충청도 산골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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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꽉 찬 아이
정운찬 후보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할아버지가 광산 채굴에 실패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신한 어머니 이경희는 걱정이 앞섰다. 손쉬운 방식으로 태아를 지우려고 익모초를 진하게 달여 마셨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고, 1947년 2월 고고성을 울린다.
한학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한 아버지 정창성은 늦둥이를 끔찍이 생각했던 것 같다. 새벽 댓바람에 서당 훈장에게 달려간 아버지는 작명을 부탁했다. 주역에 밝았던 훈장은 태어난 시간을 물어보더니 즉석에서 간단히 작업을 마무리한다. “사주가 기막히구먼. 운이 꽉 찬 놈이여. 마침 돌림자가 ‘운’이니께 ‘운찬’이라고 혀. ‘구름 운(雲), 빛날 찬(燦)’ 구름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도다. 어떤가?”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세상은 이름처럼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가 시련의 시작이었다. 딸과 아들을 합쳐 열하나를 낳고, 그 가운데 몇은 병으로 잃은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바람에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입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면사무소로 달려간 아버지는 “만날 2km를 걸어 다니려면 여덟 살은 돼야 입학할 수 있다”고 우기는 고집 센 직원과 1946년생으로 타협한다. 돼지띠가 개띠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어렵사리 들어간 학교를 그는 채 1학년도 다니지 못한다. 고향에서는 생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살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와 달동네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정착한 동숭동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이름만 그럴듯한 서울이었다.
▶▶▶‘Bus’를 ‘부스’로 읽은 소년
아무리 돈벌이를 하려고 발버둥쳐도 형편이 피지 않자 지쳐버린 것일까? 아버지가 서울살이 2년여 만에 가장이라는 버거운 짐을 내려놓고 눈을 감자 그 몫은 고스란히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의 차지가 된다. 삯바느질과 병원 빨래로 생활을 꾸려가던 형편에 미국이 구호양곡으로 보내준 옥수수에 물을 많이 붓고 묽게 끓인 죽이야 이제는 인이 밴 음식이었지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주위의 칭찬이 부담스럽고 원망스러워 절망에 빠져 있는데, 어느 날 놀라운 행운이 찾아온다. 급우의 아버지-서울대 수의과대학 이영소 학장이었다. 그분은 “경기중학교에만 들어가면 학비를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그 뒤 외국 신사를 소개해 주었다. 같은 학교에서 봉직하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였다.
영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으로 3·1운동을 지도하며 조선을 치료한 의사이자, 정 후보자의 인생에 한 획을 그어준 숙명적 은인이다. 훈장 선생의 예언이 딱 들어맞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어려울 때마다 연달아 이어지는 행운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까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 그대로 박사는 “약자에게는 비둘기처럼 부드러우나 강자에게는 범처럼 무서운” 양심적 교육가였다. 그분은 외국돈이라고는 구경하기조차 힘든 시절에 가끔 50달러짜리 캐나다은행 수표를 주어 생계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삶의 가치와 나눔의 의미를 몸소 깨우쳐 주었다.
버스(bus)를 ‘부스’로 발음해 교실이 떠나갈 만큼 웃음보를 터뜨리게 한 그에게 좋은 문장은 통째로 외우는 것을 빼고는 영어에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해준 것도 그분이었다. 그분이 가르쳐준 세상의 진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요즈음도 항상 되뇌는 것은 “정직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교훈이다.
![]() ![]() 2007년 3월8일 서울대 호암 교수회관에서 정운찬 전 총장(오른쪽)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순 선생 팔순잔치가 열렸다. |
▶▶▶가출을 꿈꾸다
교사들을 대신한 채점은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1학년 때 3학년 선배들의 화학시험지를 채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은 여전히 그를 괴롭게 했다.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 돼 4교시가 끝나면 수돗가로 달려가 맹물로 배를 채우고 뒷산에 올라가 점심시간을 때우는 그에게 비는 이마저 방해하는 불청객 같은 존재였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고 학교에 가던 처지에 입주 가정교사를 시작한 집에서 마련해준 쇠고기 장조림에 달걀말이 도시락은 호사스러웠다. 하지만 처음 싸간 도시락을 그는 다 먹을 수 없었다. 어머니부터 형과 누나까지 다섯 명이 한 방에서 칼잠을 자고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고 직장으로 향했을 식구들의 얼굴이 번갈아 어른거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학교 들어가면서 시작한 과외 지도로는 생활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스코필드 박사가 간명하게 표현한 대로 ‘부익부빈익빈(The rich become richer, the poor become poorer)’ 현상이 고착되는 상황에서 가난한 소년이 갈 곳은 학교가 아닌 것 같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챘는지, 자기 자식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어머니가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우리 집에 3대째 정승이 끊겼으니 자손으로서 부끄러운 일 아닌가? 공부에 더욱 정진해 가문의 명예를 일으켜 세워야 하네.”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은근히 정치 쪽을 권했다.
중2 때 스코필드 박사가 꿈을 물었을 때 그는 대뜸 영어로 ‘국회의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한국의 정치 현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박사는 “정치는 깨끗한 곳이 못 된다”고 충고한다. 더 나아가 “국가가 어지러울 때는 몸을 던져 그것을 구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는 것이 스코필드 박사의 가르침이었다.
▶▶▶흔들리는 20대
경기고 1년 선배 김근태의 권유로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김근태가 “온순한 성격상 너는 검사나 법관은 맞지 않을 것”이라며 법대 지망을 말렸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의 심적 갈등과 방황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그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심드렁해 보였다.
대학의 현실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경제원론 중간고사에 ‘쌀파동을 설명하라’는 문제가 나와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을 그려가며 성의껏 답안지를 메웠는데, 기말고사도 비슷했다. ‘연탄파동을 설명하라.’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문제에 그는 한마디로 답안을 대신했다.
“제 중간고사 답안지를 참고해 주세요.”
결과는 F. F학점은 그 뒤에도 계속된다. 이화여대 학생들과 50명 단체미팅을 주선해 전원 결석을 주동한 혐의로 회계학 F,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과외를 지도했던 교수에게 실망해 항의의 뜻으로 백지를 제출한 교양독어 역시 F. 학생 때부터 그는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불이익을 자초하면서도 서슴없이 ‘노(No)’라고 하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아르바이트 수입이나 좀 더 올려보려고 고교 은사가 소개해준 곳으로 과외를 옮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부잣집이라고 해서 너그러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껏 부푼 기대는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버스비와 점심값으로 하루에 100원씩 주면 되겠지?”라는 물음에 “안 된다”는 대꾸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받던 과외비와 다를 게 없었다.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매사가 무료해 맥이 풀려 있는데 의외의 손님이 나타났다. 단아한 얼굴에 그때 벌써 인문학적 교양이 넘쳐 보이는 ‘7대 가정교사’였다. 그러니까 그는 가정교사 내력이 긴 그 집안의 ‘8대 가정교사’였던 셈이다. 8대 가정교사는 바로 신영복 선생이었다.
신영복 선생은 “내가 자네보다 7년 먼저 서울상대를 다녔다”며 몇 권의 책을 소개해 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사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매력적인 영국의 경제학자 힉스가 쓴 <사회구조론>이라는 책이다. 그에게 책 읽는 재미와 책의 힘을 동시에 일깨워준 소중한 저서다.
“고전은 누구나 좋다고 여기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상한 책”이라는데, 그 책은 특히 얇아서 좋았다. 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하나 생겼다. 가정교사 월급을 받는 즉시 청계천 헌책방으로 달려가 책 몇 권을 사고, 오는 길에 동숭동에 들러 어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드리는 것이었다
▶▶▶세계로, 미래로
갈등과 도전, 좌절과 희열이 뒤범벅된 불안한 20대에 그를 방황의 터널에서 구해준 것은 영어·라틴어에 한시까지 동원해 막힘 없는 강의로 학생들을 압도한 조순 선생이다. 처음 대면하는 순간 한눈에 매료된 그는 쉬는 시간마다 칠판 당번을 자임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그에게 그것은 강의를 암기하는 복습시간이 돼주었다.
4학년 2학기, 별다른 준비도 없이 막연히 진로를 놓고 고민하는데, 조순 선생이 한국은행 추천서를 써주었다. 항상 칠판을 깨끗이 지우는 그의 성실성에 대한 보상이었다.
선망의 직장에 들어간 그는 유쾌하게 첫 발을 내디뎠지만, 여전히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엘리트만 근무한다는 조사1부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귀띔을 받았는데,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직원 때문에 임명장 수여식 당일 창구 근무로 발령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이로운 환경도, 절대적으로 어려운 환경도 없는 모양이었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환전하러 시내에 나온 길에 한국은행에 들른 조순 선생은 창구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그를 보고 유학을 권했다. 어려운 형편에 입학원서도 낸 적이 없는 그에게는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UC버클리에서 박사를 마치고 뉴햄프셔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은사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주선으로 마이애미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프린스턴대에 들어가자 그에게 세계로, 미래로 훨훨 나는 티켓이 주어졌다. 세상에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벼운 관계는 없다. 칠판 지우기로 맺어진 인연은 그 뒤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순 선생은 그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는 멘토(mentor)이자, 필요할 때마다 적시에 나타나 필요 이상의 도움을 주는 후원자(patron)였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네 분 있다. 생부와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선생에, 그를 양자로 삼은 작은아버지. 시골에 사는 작은아버지에게는 공교롭게 아들이 없었다. 사람 좋은 아버지는 동생의 부탁을 받고 둘째를 양자로 주었다. 두 집이 아들을 하나씩 나눈 것이다. 방학 때 농사를 짓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면 서울에서도 접하기 힘든 진수성찬이 그를 기다렸다.
“손에 닿지 않는 음식은 먹지 말게”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뿐이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최종적으로 징집이 면제됐다. 그래도 소총사격을 하며 예비군 훈련을 받았다.
미국 유학 중에 태어난 그의 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가 “여전히 미안하고 가슴에 부담으로 남아 있는” 정 후보자는 아들에게 “군대에 가는 편이 사회생활은 물론 네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로 조언을 했다. 자유와 자율을 가정교육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가난한 국비유학생에게는 미국이라고 서울보다 생활이 수월할 리 없었다. 조속히 학업을 마치고 직업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사학위를 받기 전인데도 미국 연방준비은행(FRB)과 보든칼리지에서 자리를 제안해 왔다. 그가 희망하던 직장은 컬럼비아대 또는 국제통화기금(IMF).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대학원 주임교수 앨런 블라인더가 기지를 발휘했다.
두 곳에 각각 전화를 해 “내일 아침 10시까지 구체적 오퍼를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온 대단한 학생을 다른 데로 보내버리겠다”고 최종 통보를 한 것이다. 더욱 속이 타는 것은 지원자 자신.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기다렸다. 1시간이 1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드디어 10시. 거의 동시에 연락이 왔다. 블라인더 교수는 과연 노련한 협상가였다. 그는 결론까지 내려주었다. “IMF도 좋지만, 학문의 길을 걸을 생각이 있으면 컬럼비아로 가라.”이틀간 진행된 컬럼비아대 패컬티 미팅에서도 행운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제학은 잘 알 테니 미국적인 것을 좀 물어보겠다”며 제임스 모리슨 교수가 꺼낸 질문이 “야구를 좀 아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구야말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로움을 달래주던 유일한 취미이자 그가 정통한 분야. 지금까지 그가 야구 팬, 그 중에서도 두산 팬으로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입학 당시 동창회장 장학금을 준 분이 마침 두산그룹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컬럼비아대에서 처음 강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100분 수업에 200분 분량을 준비해 갔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모르는 질문에는 솔직히 모른다고 답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생겼다. 학생들의 평가는 중상(upper middle).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초임 조교수의 성적치고는 괜찮은 결과였다. 이 즈음에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이 된 조순 선생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서울대가 처음으로 교수를 공채하니 응모하라는 것이었다. 대단히 고마웠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 권유였다. 추천서도 갖추지 않고 서류를 보냈다. 하늘의 선택에 앞날을 맡기겠다는 의도였다. 3명 모집에 18명이 지원했으니 경쟁률은 6대 1. 쉽지 않은 관문이었다. 그것을 통과한 뒤 그는 “칠판을 잘 지워 서울대 교수가 된 정운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민주운동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내보이며 압축성장을 주도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뒤 반짝 ‘서울의 봄’이 닥쳤으나,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정국은 혼미했다. 후배들을 가르치며 서울대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고 있는데, 저녁에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1980년 5·17사태의 시발이었다. 정도는 덜했지만, 폭력은 교수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스무 시간을 감금당한 뒤 풀려나자 경영학과 박정식 교수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맥주 한 병을 다 못 비우던 그는 그날 두 병이나 마셨는데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동료 교수 2명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해 다른 교수들의 서명을 요청한다. 250명을 목표로 했으나 동참한 교수는 49명.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현명한 처사인지도 모를 만큼 그때 상황은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던 동토였다.
청와대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두환 대통령은 “49명 전원을 해직하고 주동자 3명을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구속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강대 교수를 하다 민정당 국회의원이 된 김종인 박사였다. 그분은 “49명은 고사하고 3명만 해직시켜도 서울대가 발칵 뒤집히고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했다.
의외의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들을 구해준 셈이었다. 지금도 정치적으로 그를 자문하는 김 박사와 인연은 이렇게 싹텄다. ‘서울의 봄’ 당시에도 그는 선배 교수들이 주동한 시국선언에 서명한 적이 있다. 훨씬 전인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년 선배인 조영래·김근태 등이 주동한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영래는 나중에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전태일 평전>을 쓴 분이다.▶▶▶역사의 법정에 선 판사처럼
서울대 총장이 중도에 퇴진하자 사회과학대학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교수들이 총장 출마를 권유했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그는 한국은행 총재직을 정중하게 고사한 적이 있다. 조순 선생이 대통령 출마를 검토할 때 “선생님이 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만류해 놓고 국민의정부에서 요직을 맡는다는 것은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총장 직선에 나서라는 목소리는 하나였으나 이유는 다양했다. 마침내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서울대는 거센 돌풍에 휘말릴 것”이라는 김인준 교수의 설득이었다.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김 교수의 예측은 불행히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치열한 선거 끝에 당선된 그는 본고사 불가, 기여입학 불가, 고교등급제 불가라는 ‘3불정책’을 놓고 노무현 정부와 격렬히 대립했다.
서울대 수장으로서 그가 이룬 업적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제도개혁은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해 산간오지나 농어촌 출신 학생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 것이다.
다른 대학 총학장은 모두 정원을 늘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마당에 정원을 줄인 것도, 서울대 최초로 시각장애인을 입학시키고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도, 여덟 개의 주요 보직 가운데 세 자리를 여성교수로 채워 성적 평등을 도모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무엇보다 황우석 사태는 “앞이 캄캄해졌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약리학을 전공한 의대교수 출신 정명희 부총장에게 전문가를 중심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일임하며 “역사의 법정에 선 판사처럼 엄정한 자세를 취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황우석 사태를 대단히 가슴 아파하며 그의 재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마꾼의 어깨를 먼저 생각하게’
대학정책과 관련한 ‘3불가론’이 불거지기 훨씬 이전인 학생시절, 정 후보자는 ‘5불가론’ 앞에서 인생의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미술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신입생 최선주는 귀엽고 청순했다. 운 좋게 연인관계로 발전했으나 한국은행에 들어갈 때까지 주머니가 가벼워 변변한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 용기를 내 여학생 집을 찾은 그는 “당장 결혼할 처지는 못 되지만 서광이 비치는 날 정식으로 청혼하겠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자네가 키가 큰가? 얼굴이 잘생겼나? 아버지가 계신가? 내세울 게 있나? 장래가 밝은가?”
멀리 떠나는 것이 다행인 것 같았다. 태평양을 건너가는 순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리움은 커져갔다. 그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그것이 500통에 이르렀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무렵 용돈을 모아 장갑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반가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구원투수로 등장한 분은 조순 선생이었다. 그분은 여학생의 부모를 중식당으로 초대한 뒤 장인이 될 분과 손수 들고 간 ‘조니 워커’ 한 병을 다 비우면서 얼근해진 분위기에서 이렇게 장담했다. “정운찬이라는 학생, 보시는 것보다 좋은 사람입니다. 학위를 마치고 오면 교수 정도는 무난한 인물이니 현재만 보고 판단하지는 마세요. 적어도 장래성이 없다는 말씀은 틀린 것이니까요.”
조순 선생의 부름을 받고 서울 땅을 다시 밟던 날 그의 금의환향을 가장 반겼을 분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그분은 70세가 되던 해 이승의 고단한 삶의 끈을 놓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여러 날이 지나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유서가 돼버린 그 글에는 어머니의 기원이 간절하게 배어 있었다.
“…대하(大河)는 흘러 드는 물을 가리지 않고, 장강(長江)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했네. 광대무변하되 언제나 겸양하고, 가마를 타게 되면 가마꾼의 어깨를 먼저 생각하게….”정 후보자는 자신을 스스로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인간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유라고 믿으며, 시장은 완벽한 손이 아니므로 필요할 경우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굳이 나를 스스로 평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자, 정책적으로는 실용주의자,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자, 학문적으로는 케인스주의자,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합리적 중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사랑과 배려라고 여기기 때문에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총리를 맡으면, 그는 이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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