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검은 아오자이 긴 머리칼 사이 희디흰 얼굴 그리고 눈빛 … 웬일일까 끼치는 소름이 방탄조끼 땀 절은 군복 안으로 파고들었다.” 김태수의 시 ‘사원에서 만난 월남 여인’의 한 대목이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월남전 참전 군인의 신산한 일상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월남과 월맹이 남북으로 갈려 대치하다가 전쟁 상태에 돌입하자 미국은 1964년 월맹군이 미 구축함을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본격 참전했다. 우리나라도 그해에 ‘자유세계 수호’, ‘세계 평화 유지’를 명분 삼아 월남 파병을 결정했다. 남북 분단 등 우리와 유사하다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197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명이 월남에 파견됐고 4600명이 전사했다.
월남전은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월남에 파견된 병장 월급이 5급 공무원과 맞먹을 만큼 많았다. 이들이 흑백 TV 한 대씩 사 들고 귀국하면서 우리나라에 TV 시대가 열렸다. 월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폭격 속에서 사업을 벌여 자본을 축적했다. 장사꾼은 탄피를 줍고 구리를 팔아 돈을 모았다. 반면 월맹 지도자 호찌민은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다산 제삿날에는 제사까지 지낼 만큼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한 뒤 월맹은 1975년 총공세를 벌여 월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을 함락했다. 미국이 처음으로 전쟁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에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지역이 공산화되면 인접 지역도 차례로 공산화될 위험이 커진다는 ‘도미노 이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불행은 발생하지 않았다.월남전은 그 시대의 불가피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와 베트남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 가운데 ‘월남전쟁’이라는 단어를 삭제할 모양이다. 이 대통령 국빈방문을 앞두고 베트남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국익 차원에서는 이해할 만하지만 씁쓸하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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