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인 지적 에너지 이미 일본도 능가 `21세기, 세계는‘코리안 DNA’원한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9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전신애(66) 전 미연방 노동부 차관보는 일찌감치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인터뷰하기로 한 날은 토요일이었던 지난 10월 24일 오전 10시. 가급적 평일에 만나려고 했지만 그의 스케줄이 워낙 빡빡했다. 감색 바지 정장 차림의 그는 휴일 아침인데도 옅은 화장과 적당한 크기의 액세서리, 단정한 헤어스타일로 매무새를 완벽하게 가다듬고 취재진을 맞았다. 일리노이 주정부 최초의 동양계 각료(금융규제부장관), 한국계 여성 최초의 미 연방정부 차관보, 1950년 이후 미 노동부의 최장수 여성국장….이민 1세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주인공이 지금 마주 앉은 이 자그마한 여성이 맞는지 잠깐 헷갈렸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는 대학(이화여대 영문학과)을 졸업한 후 ‘동성동본과의 결혼은 안 된다’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1960년대에 유학 중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남편의 권유로 노스웨스턴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른둘의 나이에 이민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리노이 이중언어교육센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아시아계 이민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한 공로를 인정 받아 일리노이 주정부에서, 다시 미 연방정부에서 각각 장관으로 ‘파격 발탁’됐다. 미 노동부 여성국 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이었던 그는 올 1월 은퇴할 때까지 무려 8년간 이 자리를 지키며 ‘최장수 여성국장’의 명예도 얻었다.
- ▲ 2005년 서울에서 열린 ‘2005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에서 기조강연자로 나선 전신애 당시 미 노동부 차관보. photo 조선일보 DB
귀국 후 모 일간지와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미국 신문엔 미국만 보이는데 한국 신문은 세계가 보이더라’고 말해 화제가 됐습니다. “어떨 땐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보다 저처럼 다른 나라에 살다가 한번씩 한국을 찾는 사람 눈에 한국이 더 잘 보이지요. 미국 신문은 철저하게 자국 이슈만 다룹니다. 국내에서 화제가 되는 얘기만 다뤄도 얼마든지 지면을 꾸릴 수 있으니까요. 중국·인도 등 아시아로 권력구조가 이동한다고 떠들면서도 정작 아시아 뉴스는 다루질 않아요. 유럽 쪽 얘기도 좀처럼 접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신문을 펼쳐 드니 지면 가득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의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요. “사실 한국은 (제가 장관으로 있었던) 일리노이주보다 면적이 작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경쟁에 관심이 많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굉장합니다. 그건 장점일 수도, 또한 단점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한국처럼 작은 나라는 수출이 주력사업이고,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협력관계가 중요합니다. 결국 한국인이 세계 무대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려면 세계 각국으로부터 존경 받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공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그런 면에서 한국 신문은 무척 유용합니다. 한·중·일 3국이 연대해 ‘아시아 파워’를 형성하는 과정이나 지지부진한 대미 FTA 대신 유럽시장을 뚫는 한국의 외교 전략 등이 생생하게 전달되니까요. 전 대책없이 미국으로 와 고만고만한 한국인끼리 모여 사는 기러기 가족보다 매일 신문을 충실히 보는 한국인이 글로벌 시대에 훨씬 경쟁력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겠지요. “있지요. 학교와 정부의 뒷받침이 좀 더 튼튼해야 합니다. 학교는 커리큘럼을 재정립할 때가 됐어요. 최근 미국엔 ‘(큰) 대학 속 (작은) 대학’ 설립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학사과정을 약간만 조정해 로스쿨이니 MBA니 하는 학위과정을 굳이 수료하지 않아도 학부에서 충분히 관련 지식을 익히고 취업하는 구조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교수들이 발벗고 학생의 코치와 멘토를 자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탄탄한 장학금 혜택과 풍부한 인턴십 기회도 보장됩니다. 아마 향후엔 이런 대학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을 거예요. 한국 학교들도 이런 변화에 관심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뒷받침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한국 정치인들은 너무 자주, 심하게 싸웁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요. 제 눈에 그들은 미래의 한국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코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로 보여요. 한국의 가장 불행한 모습입니다. 물론 미국 의원들도 싸웁니다. 그렇지만 싸우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소수예요. 주류가 아니지요. 나머지는 어떻게든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진취적으로 실행해나가요. 그런데 한국 국회의원들은 ‘싸우기 대장’이에요. 요즘 같은 때 모든 한국인이 힘을 뭉쳐 일하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텐데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다른 어떤 분야보다 글로벌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한국 정치인인 것 같아요.”
한국인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요. “그건 비단 제 생각만이 아닙니다. CNN이 지난 10월 13~21일을 ‘한국주간’으로 정하고 ‘Eyes on South Korea’란 특집방송을 편성, 매일 방영했지요. 왜 유독 한국이었을까요. 전 관료 일을 오래하며 세계 각국 국민의 지적 에너지(intellectual energy)를 가늠해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제가 느낄 때 한국은 지적 에너지 면에서 이미 일본을 능가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세요. 지금 일본 젊은이가 어디 뉴스에 오르내리나요? 한국인의 DNA엔 특성이 있어요. 새 것 좋아하고 변화에 민감하며 성공에 강하게 집착하지요. 예전엔 그게 결점이었을지 모르지만 급속도로 변화하는 21세기엔 전부 다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한국인 중에도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앞으로 창출되는 일자리의 3분의 2는 학사학위 갖고도 따기 힘들 거예요. 학문적 깊이를 갖추거나 전문성이 바탕이 되거나 둘 중 하나는 충족시켜야지요.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경쟁을 통한 교육은 불가피합니다. 다만 한국에 쓸데없는 경쟁이 너무 많다는 건 저도 인정해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일인데 학교에서 학부모 면담을 요청해왔어요. 아들이 제 아빠를 닮아 똑똑하다는 소릴 꽤 듣던 터라 내심 선생님께 칭찬 받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신 아들은 우리 반의 똑똑한 7~8명 중의 한 명에 속합니다.’ 맥이 빠졌어요. 그게 미국 교육이에요. 점수와 순위에 연연하지 않지요. 얼마 전 신문에 전국 고교 순위가 공개됐더군요. 점수·졸업생 평판·졸업생 사회 기여도 등 평가기준은 여러 가지일 수 있는데 등수를 매겨 공개해버리니 학부모 입장에선 상당히 고민스럽고 피곤할 것 같아요.”
평가 잣대는 다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제일 객관적 지표는 점수 아닐까요. “글쎄요. 남편이 서울대 화학공학과 13회 졸업생입니다. 당시로선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였지요.
남편과 함께 공부했던 세대의 삶이 곧 대한민국 성공사 50년인 셈이에요. 얼마 전 졸업 50주년 기념 동창회가 있어 남편과 함께 참석했는데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공대생이라고 해서 공학만 가르치면 안 된다, 경제학·인문학·예술도 가르쳐야 한다는 거였어요. 전문가일수록 르네상스적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요. 미국에선 내로라하는 기업 회장들도 1년에 한두 번은 빈곤국 봉사에 나섭니다. 지인 중 세계 각국을 돌며 봉사활동하는 동포 2세 청년이 있어요. 한번은 그 친구가 탄자니아에서 홀푸드(Wholefood·미국 유기농식품 전문 체인) 회장을 우연히 만났다더군요. 자기 직업과 아무 상관 없는 육체노동으로 봉사활동 중이었대요. 한국에서도 점수에 집착하는 학생, 돈에 집착하는 기업가 대신 무형적 가치에 눈을 돌리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계 인류에 공헌하는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느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바쁜 와중에도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첫째는 변호사, 둘째는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지요. 참 기막힌 건 그애들에게 제가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한마디로 손을 뗐죠(hands off). 지금 와서 ‘그때 내가 왜 그랬나’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의 영향이 컸어요. 대개 부모님의 관심은 장남·장녀에게 집중되곤 하지요. 나머지 자식들은 자기 멋대로 크는 거예요. 저 역시 그랬어요. 내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영능력·행정능력을 익혔지요. 그래서인지 전 잔소리라면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어해요. 심지어 쓰레기 좀 갖고 나가라, 현관 신발은 가지런하게 놓아라 같은 말도 안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정리정돈이 몸에 밴 남편은 늘 불만이었지요. (웃음) 그런데 당시 제게 그런 잔소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름대로의 교육관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잔소리보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훨씬 교육에 효과적인 건 분명해요.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에게 우리 부부는 ‘열심히 사는 부모’ ‘항상 뭔가를 읽고 공부하는 부모’ ‘이웃과 자주 왕래하며 베풀 줄 아는 부모’였을 거예요. 그런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 애들이 언제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줬지?’ 하고 놀랄 때가 있어요. 제가 아들 자랑 좀 할까요. (웃음) 매너가 좋아요. 남 앞에서 우쭐해하는 법이 없지요. 늘 반듯하게 상대를 대하고 모나지 않은 표현을 써서 말합니다. 저만 해도 한국식 경쟁이 몸에 배어 은근히 제 자랑하는 게 있는데 제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걸 보며 새삼 느낍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상상조차 못할 만큼 엄청난 재주와 능력을 갖고 있구나!’ 하고요.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잠재성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덴 남편의 외조도 한몫했지요. “그럼요. 남편이 아니었다면 대학원 진학도, 취업도 못했을 거예요. 미국 생활 초창기 공부를 계속하라는 남편의 설득에 제가 그랬어요. 내가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해서 ‘이제 당신 싫다’고 하면 어쩔 거냐, 그러니 내가 공부 안 하는 게 당신한테도 좋은 거다. 협박 아닌 협박이었지요. 그때 남편의 대답이 뭐였는 줄 아세요? ‘그건 그때 가서 보자!’(웃음)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경상도 남자 특유의 가부장적 기질이 없었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늘 남을 돕는 사람이었지요.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남성은 별로 환영을 못 받지만 미국인들에게 남편은 언제나 인기 만점이었어요.”
직장생활과 가정 일을 병행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았겠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춘향이처럼 잘해요. (웃음) 집에 오면 절대로 남편 위에 군림하거나 남편을 거느리려 하지 않지요. 밖에서 무슨 일을 했든, 어떤 지위에 있든 그건 바깥에서 끝내야 해요. 아직도 남편이 보는 ‘주부 전신애’는 툭하면 접시를 깨뜨리는 실수투성이거든요. 일하는 여성은 머리를 쓸 필요가 있어요. 이를테면 요리도 그래요. 제 경우, 할 줄 아는 음식의 가짓수가 많진 않지만 스테이크 등 몇몇 메뉴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어요. 그래서 전 요리를 할 때도 잘하는 건 최고로 차려내는 대신 못하는 건 과감하게 외부 힘을 빌렸어요. 한식도 마찬가지예요. 송이버섯·더덕·김치 등 종류는 많지 않아도 몸에 좋고 맛있는 재료를 사다가 정성껏 차려내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집 식사모임에 초대된 분들은 다 제 상차림을 좋아하셨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고 그렇지 못한 건 솔직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런 면에서 살림이나 일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새 책에서도 그렇고,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줄곧 강조해왔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요즘은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결혼을 미루고 일단 결혼한 후에도 쉽게 이혼을 결심합니다. 일장일단이 있어요. 싫은 사람과 평생 사는 것보단 이혼하는 게 낫겠지만 또 누군가는 너무 쉽게 헤어지니까요. 어떻게든 혼자 될 가능성이 크고, 같이 산다 해도 배우자가 자기보다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지요. 결국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에요. 미국에선 지난 경제위기 때 남편의 75%가 실직했다는 통계가 발표됐어요. 남자들이 주로 종사하는 건축·생산·금융·투자 직종의 타격이 컸기 때문이지요. 반면 교육·정부·건강 쪽 종사자가 많은 여성의 실직률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어요. 물론 보수는 남자보다 적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맞벌이 부부였다면 둘 중 하나는 직장에서 살아남았을 거예요. 맞벌이는 일종의 보험이지요.”
일부 여성은 ‘적은 돈 받고 일하느니 그 정성을 자녀교육에 쏟는 게 더 이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맞벌이 부부는 외벌이 부부보다 경제적 여유가 훨씬 많기 때문에 아이들이 겪는 경험치도 훨씬 풍족해져요. 컴퓨터 사양도, 여행의 횟수와 규모도, 심지어 만나는 사람의 수준도 달라질 수 있지요. 저 역시 5년간 전업주부였던 사람이에요. 그땐 그 생활이 마냥 좋았어요. ‘애 둘과 어른 하나’가 아니라 ‘애 셋’이서 동물원이며 박물관이며 미시간 호수며 신나게 돌아다녔지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여자가 꼭 집에서만 잘하란 법은 없더라고요. ‘일하는 엄마’는 아이들이 일찍 자립심을 갖는 데도 효과적이에요. 엄마가 따라다니며 눈물 콧물 닦아줄 수 없으니 스스로 건강을 챙겨야 하고,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줄 수 없으니 혼자서 시간 맞춰 스쿨버스를 타고 내려야 하지요. 전 전업주부가 꼭 아이에게 더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출산 이후 여성이 다시 일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 며느리가 치과의사인데 아직 애가 없어요. 지금은 주5일 근무를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주3일만 일하겠다더군요. 앞으론 고전적 의미의 직업도 상당히 달라질 겁니다. 꼭 어딜 나가서 일해야 하나요? 재주가 있으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요. 제가 이번에 책을 써보니 재택근무도 상당히 매력적이더군요. 직장 다닐 땐 출퇴근에만 세 시간씩 걸렸는데 그 시간을 아껴 운동하고 휴식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점심 때마다 백화점 식당가에서 삼삼오오 모여 밥 먹고 수다 떨며 소일 하는 한국 여성들을 보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어요. 저 중에도 엄청난 가능성과 재주를 지닌 이들이 많을 텐데 얼마나 국가적 손실일까 싶어요. 지금 어머니 세대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20~30대 여성이라면 반드시 자기 일을 찾으라고 권하겠어요.”
요즘 한국에선 청년실업자 문제가 심각합니다. ‘스펙’ 쌓기에 찌들고 높은 취업 문턱에 또 한번 좌절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저도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니 따지고 보면 한국산(産)이잖아요. 저 역시 영문과 가보겠다고 졸음 쫓아 커피 마셔가며 공부했지요. 그뿐인가요. 제가 ‘과외세대 1호’예요. 중학생 땐 고교생 오빠들 틈에 끼어 영어과외를 받았고 고교 입학 후엔 아침 7시부터 수학 과외수업을 들었어요. 악기도 하나 익혀야 한다고 해 바이올린도 배웠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더라고요. 제가 지금도 펄쩍펄쩍 뛰어 다니는데 다 그때 열심히 배우고 바쁘게 산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말고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산이다, 이렇게요. 원래 제 꿈은 아이를 여섯쯤 낳아서 유모 앞세우고 대장질 해먹는 거였어요.(웃음) 그런데 환경이 바뀌고 거기에 적응하다 보니 기회가 생겼고 여기까지 왔지요. 저에 비하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얼마나 ‘준비된 인재’인지 몰라요. 굳이 남들 눈치볼 필요 없어요. 내 재주가 뭔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생각해본 후 소신 있게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11월 4일 출국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10월 말에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약간 늦춰졌어요. 앞으로도 1년에 두 번씩은 꼭 한국에 올 생각입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은퇴자에게 가장 값진 삶이 뭘까 고민해봤어요. 돈? 출세? 아니에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는 거예요. 어제 출판사 측에서 마련한 강연회가 있었어요.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행사였지요. 휴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피하는 시간대예요. 그때 행사를 열면 ‘미쳤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한국은 다르더군요. 교통체증 때문에 약간 늦긴 했지만 예정된 인원이 전부 모였고 2시간 내내 열기도 뜨거웠어요. 대학생부터 5~10년차 직장인까지의 20~30대 여성들이었지요. 몸은 힘들었지만 반응이 너무 좋아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앞으로도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해 남은 시간을 쓰고 싶어요. 책을 통한 멘토링 작업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1965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71년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졸업(사회정책학 석사)
1976년 일리노이 이중언어교육센터 컨설턴트로 취업
1978년 일리노이 난민교육센터 소장
1980년 일리노이 복합문화연구원 원장
1984년 일리노이 주지사 특별보좌관(아시아 담당)
1989년 일리노이주 금융규제국 국장
1991년 일리노이주 노동부장관`(~1999년)
1996년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수상(이화여자대학교)
2001년 미연방 노동부 여성국 담당 차관보(~2009년)
2002년 여성지위향상 공로상(미 전국여성조직위원회)
2004년 Pace`-`setter Award 수상(미 남부여성공직자협회)
2005년 Alumni Merit Award(노스웨스턴대학 동창회)
2006년 자랑스런 한국인상(동포사회발전후원재단)
2007년 KBS 해외동포상(한국방송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