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고 장수 식단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달 20일, 15시간의 비행 끝에 지중해 한가운데에 있는 그리스 크레타섬에 도착했다. 한나절도 되지 않아 기자의 건강 식생활 상식은 여지 없이 깨져나갔다. '하루 세끼를 규칙적으로 먹는다', '과식하지 않고 일정량을 먹는다', '모든 음식을 골고루 균형있게 먹는다'…. 크레타에선 이런 '상식' 이 전혀 안 통했다.
- ▲ 지난달 20일 크레타의 팔레아루마타 마을의 70~80대 노인들이 전통 식당에 모여 3시간짜리 점심을 먹고 있다. 크레타 사람들은 이들처럼 하루에 한 끼는 푸짐하게 먹고 나 머지는 간단하게 때운다. / 이금숙 헬스조선 기자 lks@chosun.com
- ▲ 지난달 20일 크레타의 팔레아루마타 마을의 70~80대 노인들이 전통 식당에 모여 3시간짜리 점심을 먹고 있다. 크레타 사람들은 이들처럼 하루에 한 끼는 푸짐하게 먹고 나 머지는 간단하게 때운다. / 이금숙 헬스조선 기자 lks@chosun.com
- ◆하루 한 끼만 '폭식'하는데도 아흔까지 '쌩쌩'
크레타 이라클리온 국제공항에서 승용차로 산길을 3시간 달려 도착한 작은 마을 팔레아루마타. 크레타 올리브연합에서 전통식당으로 인증한 작은 식당에 들어섰다. 간판조차 없는 식당에는 나무 테이블 10여개가 놓여 있었다. 조금 지나자 백발의 70~80대 노인 11명이 왁자지껄하게 들어왔다.
최연장자 주가나키스씨(85)는 식사 중 "한국 여기자에게 바친다"며 '리지티코'라는 마을의 전통 노래를 불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크레타 건강식 때문에 아직도 25세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 마을에서 만든 와인을 곁들여 오후 1시에 시작된 식사는 오후 4시쯤 끝났다. 노인들이 먹은 음식은 기자가 평소 먹는 양의 5배는 돼 보였다. 주인 흐러술라씨는 "오늘 먹은 요리가 크레타의 전통적인 풀코스 메뉴"라며 "크레타 사람은 하루 세끼 중 점심 또는 저녁 한 끼만 제대로 식사하고 나머지 두 끼는 과일, 엘리니코(그리스 커피), 파이 등으로 간단하게 때운다"고 말했다.
크레타인은 고유한 식단 덕분에 심장질환과 각종 암 발병이 적다고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 한 끼 폭식이 '건강 식단'이란 말인가? 취재를 계속하면서 의문은 조금씩 풀렸다.
◆올리브 오일, 유기농 채식이 비결
다음날 만난 하니야국립농업대학 메지다키스 교수는 "크레타인은 고기와 생선을 덜 먹고 채소와 콩, 요구르트를 많이 섭취한다. 섬에서 나는 농산물은 거의 100% 유기농법으로 재배한다. 무엇보다, 모든 요리에 항산화 기능이 탁월한 올리브 오일이 들어가는 것이 건강식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팔레아루마타 식당 노인들도 토끼와 양 고기를 조금씩 맛봤을 뿐, 나머지는 올리브 오일로 양념한 채식과 통곡물빵이었다. 크레타의 1인당 하루 육류 평균섭취량은 35g으로, 이탈리아·스페인 등 다른 지중해 국가(140g)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생선 섭취량도 18g으로 다른 지중해 국가(34g)의 절반 정도이다.
크레타인은 1인당 연간 25㎏의 올리브 오일을 먹는다. 세계 2위 이탈리아(12㎏), 3위 스페인(8㎏)보다 2~3배 많다.
올리브 전문가 아르혼다키스씨는 "크레타인은 위가 아프면 올리브 오일을 한 숟가락씩 먹는다. 또, 술을 많이 마시기 전에도 미리 올리브 오일을 마셔 위를 보호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크레타 사람은 식사를 여럿이 모여 천천히 한다고 메지다키스 교수는 설명했다.
예상과 달리 크레타인은 생선이나 해산물도 거의 먹지 않았다. 취재차 들린 20곳의 음식점 어느 곳도 오징어나 홍합 정도를 제외하면 생선이나 해물 요리가 별로 없었다.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루파키스씨는 "크레타는 섬이어도 산이 많기 때문에 바다 근처가 아니면 생선이나 해산물 구경은 하기 어렵다. 대부분 자기 마을에서 난 곡식과 채소, 요구르트, 치즈 등을 먹는다"고 말했다. 크레타인은 쇠고기 등 육류 소비량도 지중해권 다른 나라보다 적다.
- ◆자기 마을에서 재배한 식재료만 먹는 고집
제주도 4.5배 면적에 62만명이 사는 크레타섬은 마을마다 시장에 진열된 채소, 과일, 치즈가 조금씩 다르다. 자기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만 먹기 때문이다. 크레타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올리브 오일도 마찬가지다. 하니야시(市) 디모띠끼 시장에서 올리브 오일을 파는 스텔라씨는 "크레타에서는 매년 올리브 오일을 110만t을 생산하는데, 지역마다 맛과 향이 다른 브랜드가 수십 종이 있다"고 말했다.
크레타섬 서부 내륙 알파 마을에서 올리브 오일 공장을 운영하는 볼키라키스씨를 만났다. 올리브 수확철 11월을 앞두고 오일 탱크 세척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가 "점심을 먹자"며 공장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그는 1L들이 올리브 오일을 따더니 딱딱한 통곡물 빵 '팍시마디' 위에 흥건히 흘렸다. 팍시마디는 우리의 쌀밥과 같은 크레타의 주식(主食). 아기 손바닥만한 작은 빵 6개를 적시는데 200mL 우유 한 팩 정도의 올리브 오일을 썼다. 과연 저 '기름빵'을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한 입 베어 물자 올리브의 고소하고 향긋한 풀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토마토, 양파, 고추 피클 등을 넣은 그리스 샐러드가 뒤따랐다. 움푹 파인 대접에 담긴 샐러드는 올리브 오일이 철철 넘치는 '올리브 바다'였다. 이어, 그라비에라 치즈, 요구르트, 올리브 오일에 절인 올리브 열매, 라끼가 나왔다. 볼키라스씨는 "보통 가정마다 한 끼는 이렇게 먹는다"고 말했다. 22일 저녁, 크레타에서 모든 취재를 마치고 혼자 저녁을 먹으러 이라클리오에 있는 식당에 갔다. 식당 주인이 "왜 혼자 왔느냐. 크레타에서는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없다"고 말을 붙여왔다. 그러면서 전통술 라끼 세 잔을 공짜로 건네며 말동무가 돼 주었다.
마지막으로 무공해 농산물로 만든 음식과 먹는 사람의 넉넉한 마음가짐이 어우러지는 것이 최고의 건강 식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