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한산대첩

화이트보스 2009. 11. 14. 12:41

한산대첩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使) 이순신은 우수사(使) 이억기()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使)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특히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 논개()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① 제1차 진주싸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使) 김시민()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② 제2차 진주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西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반성()·의령()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使) 김천일(), 경상우병사(使)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의병장 고종후()·이계련(민여운()·강희열(),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使)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使)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이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