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독 오른 살쾡이의 눈빛… 훈련 참관하던 국회의원이 졸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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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부대.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게 됐지만, 정작 그 실체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던 2000년대 중반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하며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오항균 예비역 소장은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 처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공개모집과 정식 부사관 임용을 통해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로 자리매김한 현재의 실체에 이르기까지, 베일에 싸인 정보사 산하 특수임무부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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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의 어느 아침. 자줏빛 단풍으로 물든 산야가 아리도록 곱다. 아직 열여덟의 어린 나이, “동무,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북한군 병사를 향해 무참히 방아쇠를 당기던 손끝의 감촉이 수풀 속에 엎드린 그의 뇌리에서 접착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북한군 막사 비포장 군사도로 언덕 위로 정치보위부 소대 병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한 소련 군사고문관의 호위병력. 그는 크레모어 격발기의 안전핀을 풀고, 팀장의 신호에 맞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 계곡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하늘을 찢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북한군 군관을 잡아채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방망이 수류탄의 파편.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혀는 바싹 말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10시간 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우리군 GOP 통문에 다다랐다. 미리 당도해 있던 동료 팀원이 살아온 그를 보고 눈물을 쏟는다. ‘다시는 이런 목숨 거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으로 되뇌임이 이어지지만, 쉽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홍남형(가명·60)씨가 인천에서 ‘물색관’에게 입대를 권유받은 것은 1966년 3월,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1968년 11월의 침투임무는 그가 수행한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원의 돈을 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30여 년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을 넘나든 인물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작전하다 죽은 동료의 누이를 알고 있었지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에 끝내 전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군의 모든 부대는 전시를 ‘대비’하는 부대다.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국가의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훈련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도 끊임없이 휴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다. 다만 비공식적이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북파공작원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김성호 전 민주당 의원이 관련 책의 제목을 ‘우리가 지운 얼굴’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9년 현재, 북파공작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비밀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1999년부터 쏟아져 나온 전직 부대원 및 그 유가족의 증언은 이들의 존재와 역사적인 실체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다. 2004년 영화 ‘실미도’로 대중의 관심은 폭발했고, 정부 역시 같은 해 관련법령을 제정하고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총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 가운데 무려 7726명이 임무수행이나 훈련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공식 보고였다. ‘군사기밀’이라는 네 글자에 가려 있던, 베트남전보다 많은 사망자의 사연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퇴역 부대원들의 기억에 의존한 북파공작부대 이야기는 지나치게 파편적이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 일쑤였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운용해온 대북 첩보부대의 정확한 얼개와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누구나 북파공작을 알지만 그 정확한 내역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는 형국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정보사령관을 지낸 오항균 예비역 육군소장(육사 29기)은 이를 체계 있게 들여다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양지로 쏟아져 나오던 시점에서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퇴역자나 유가족들과 만나 실태를 듣고, 정보사가 보관하고 있는 관련 기록을 뒤져가며 작전내용과 종사자, 전사자를 확인하는 한편, 보상 법률에 대한 시행령을 입안하는 작업까지 진행했다. 한마디로 북파공작 임무의 어제와 오늘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오 전 사령관의 회고와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 시기 전역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취합해 북파공작부대의 극적인 역사와 그 맥을 잇는 정보사 특수임무 부대의 현재를 하나씩 정리했다. “손에 쥔 건 자폭용 수류탄 뿐” 북파공작의 시작은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적으로는 1948년 건국 직후 창설된 육군본부 정보국을 연원으로 보지만, 이전부터 38선을 넘나들던 민간유격대나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까지 그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찮다. 이후 창설된 육해공군 첩보부대는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 가운데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있었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북한 지역에 뛰어든 평범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열여덟 여학생의 몸으로 첩보작전에 참여했던 김부전(74)씨의 회고다 |
“여성계 지도자들의 독려에 따라 어린 여학생들이 첩보임무에 자원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갈래머리를 잘라 파마를 하고 는 배를 타고 북한 후방지역으로 투입됐다. 원래는 백마산의 유격단체를 접촉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이미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고, 대신 인근 지역 지하에 은폐돼있던 대형 비행장 시설을 확인해 보고하는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다. 무장이라고는 붙잡힐 경우 자폭할 수 있도록 쥐여준 수류탄 하나가 전부였다.” 동해와 서해, 육상과 공중으로 나뉜 이들은 중국군의 참전 사실 확인, 북한군 고위간부 납치, 주요 군사시설 파괴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을 전후해 이들 첩보부대는 육군의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의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의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로 체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목장, 물색관, 왕사장 전쟁이 끝난 뒤 북파공작은 ‘무장공비’로 불렸던 북측의 침투에 대응하는 보복 공격 형태로 이뤄졌다. 쉽게 말해 북파부대는 한국 측의 무장공작원이었던 셈. 차이가 있다면 북한군의 무장공작이 후방침투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의 활동은 주로 휴전선 인근에 있는 북한군 연대·사단본부 등을 파괴하는 5~10명 단위의 임무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부터 각 군 첩보부대는 안전가옥 형태의 훈련소를 여러 지역에 설치해 운영했다. 육군 HID의 경우 흔히 ‘목장’으로 불린 청계산 훈련소를 비롯해, 집 한 채와 텃밭이 전부인 안가가 인천, 논산, 춘천, 전곡, 인제 등 수십 개에 달했다.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서 ‘춘천대’ 등으로 불렸다. 대원이 생포되는 경우 전체 부대의 규모를 발설할 수 없도록 훈련소끼리도 거의 교류 없이 지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른바 ‘민수’)이었다는 점이다. 군인을 투입했다가 생포될 경우 정전협정 위반으로 국제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민간인들을 데려다 쓴 것. 내부적으로 군인 신분을 부여한 경우에도 군번이나 계급을 알려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흔히 ‘물색관’으로 불린 첩보부대 관계자들은 기차역 같은 번화가에서 ‘몸이 좋은 젊은이’를 골라 “공무원 자리를 보장해준다”거나 “집을 몇 채 살 수 있는 큰 돈을 주겠다”며 섭외하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과 보안 철저준수를 강조한 폐쇄성의 폐해도 컸다. 훈련 중에 사망하거나 북한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경우에도 유가족에게 제대로 통보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훈련 중에 중대범죄가 발생하면 자체적으로 즉결처분해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도 많았다. 북파공작부대가 인권유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배경이었다. 이 무렵의 한 전역자는 “육신이 워낙 고단했기 때문에 일단 실컷 먹고 푹 자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언제 전역하는지도 몰랐다가 ‘왕사장’으로 불리던 HID 대장 앞에 가서 ‘전역 후 보안엄수 서약서’를 쓰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는 것. 집 몇 채를 살수 있는 거금을 준다는 약속은 깨끗이 사라졌지만, 부대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는 이야기다. 수도꼭지를 잠가도… 앞서 말했듯 북한군 전방 군사시설 공격이 주를 이뤘던 북파공작은, 그러나 1968년 1·21사태로 급변한다.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진출한 이 사건은 정권 핵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군에 기존의 첩보부대와는 별도로 ‘후방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 등 수뇌부 암살을 시도할’ 새로운 형태의 북파공작 기획을 지시한다. 이와 함께 육군 HID가 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개편되어 ‘설악개발단’이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는 등 편제가 정규화됐고, 해병대도 별도의 첩보부대를 창설했다(이 부대는 1975년 해군 첩보부대로 통합된다). 오 전 사령관에 따르면, 조천성 HID대장(당시 준장)이 훈련을 책임졌던 ‘새로운 형태의 부대’는 형식상 군별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68년 4월 창설돼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공군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소속이었다. 침투 용이성을 위해 북한 지역과 매우 가까운 서해 섬에 하나씩 자리한 형국이었다. 각 부대는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어 총 93명에 달했다. 실미도 부대 대원들은 영화 줄거리와는 달리 전과자 출신이 아니었고, 북파공작부대를 통틀어 선갑도 부대만이 교도소에서 사면을 약속받고 차출된 이들로 구성됐다. 이렇듯 각 군이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중복 편성한 데는 ‘충성경쟁’이 한몫했다는 게 같은 시기 AIU에 참여했던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수 회장의 평가다. 그러나 1971년 8월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하자, 놀란 중앙정보부와 각 군 수뇌부는 나머지 두 부대도 바로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부대원들 일부가 ‘보안유지’를 위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이듬해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됨에 따라 한국군의 북파공작 수행은 공식 중단을 맞게 된다. 그러나 퇴역자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첩보수집이나 북한군 전방부대 공격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는 경험담이 적지 않다. 오 전 사령관은 “수도꼭지를 잠가도 단번에 물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렇다 해도 1972년을 기점으로 북파임무의 횟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군 내부에서도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들 부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이에 따라 1990년 국방부는 정보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이들 부대를 배대웅 당시 중장이 사령관을 맡고 있던 국군정보사령부 산하로 통합한다. 물색관 제도가 사라지고 대신 알음알이로 지원병을 받는 형식으로 모집형태가 바뀐 것이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안가가 하나 둘씩 폐쇄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특수임무를 수행할 첩보부대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거꾸로 이들의 존재 자체는 숨길 수 없게 돼버렸다. 1999년 말 전직 북파공작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회복과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 보상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 여기에 김성호 의원 등 정치권의 실체공개가 이어지면서 2002년 정부는 관련 법률을 개정해 임시방편으로 위로보상금을 지급하기에 이르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적절한 예우를 요구하는 관련자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오 전 사령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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