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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특파원 시절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다. 평양만 보고 북한을 말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듯이 수도만 보고 그 나라를 논한다는 것은 코끼리 다리 만지고 코끼리에 대해 떠드는 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레이시아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무식한 자의 용감함 탓이 크겠지만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의 그렇고 그런 나라로 여겼던 사람이라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내리는 순간 착각도 유분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동남아의 최첨단 허브 공항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이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들어서면 지상 88층, 높이 452m의 페트로나스 트윈 빌딩이 시야에 들어온다. 2005년 대만 금융센터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한국과 일본 건설업체가 하나씩 맡아 시공한 이 쌍둥이 빌딩은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800달러 정도지만, 쿠알라룸푸르 시내만 보면 선진국 대도시에 와 있는 것 같다. 열대의 녹지를 배경으로 쭉쭉 뻗은 각양각색의 초고층 빌딩들이 도시 건축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국제화된 분위기다. 어디를 가도 영어가 자연스럽게 통한다. 공용어는 말레이어지만 영어가 준공용어처럼 쓰인다. 한국 국제교류재단과 말레이시아 국제전략연구소(ISIS)가 공동 주최한 한국-아세안 포럼에 참석한 현지인들은 한결같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슬람을 믿는 말레이인(65%)과 중국인(25%), 인도인(7%)이 어울려 사는 다인종·다종교·다문화 사회인 까닭에 외국인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적지 않은 수의 세계적 다국적기업들이 동남아 본사를 쿠알라룸푸르에 두고 있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울보다 훨씬 국제화된 도시가 쿠알라룸푸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지만 국교는 이슬람이다. 외출할 때 여성들은 스카프를 두르고, 현지 신문들은 무슬림들이 하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매일 조금씩 바뀜)을 매일 알려준다. 호텔 방에는 성경과 함께 코란이 비치돼 있고, 호텔 방 천장이나 침대맡 서랍장에는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향하는 메카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돼 있다. 모든 식음료에는 무슬림이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여부가 표시돼 있다. 중동의 돈 많은 무슬림들이 관광지나 쇼핑 장소로 말레이시아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난해 말레이시아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2200만 명으로 한국의 3배가 넘었다.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주석 등 각종 지하자원과 열대 농산물의 주산지이기도 한 말레이시아는 말라카 해협을 끼고 있는 동남아의 전략적 요충이기도 하다. 중동산 원유 등 각종 원자재와 상품을 실은 선박이 인도양을 거쳐 남중국해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라카 해협을 거쳐야 한다. 15~16세기 말라카 왕국이 동서양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천혜의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당시 말라카항은 120여 가지 언어가 통용될 정도로 국제화된 무역항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다문화·다인종적 전통은 이미 그때 형성됐다.
중국도 최근 들어 말레이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포럼 기간 중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말레이시아를 국빈 방문했다. 후 주석은 명나라의 정화 함대가 들렀던 말라카항을 둘러보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말라카 해협은 21세기의 ‘해양대국’을 꿈꾸는 중국에 전략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쿠알라룸푸르가 이슬람 금융의 메카로 떠오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말레이시아는 이슬람권 상거래의 표준을 만드는 지적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세계 이슬람권에 퍼져 있는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도 막강하다.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권에 대한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말레이시아와 손잡고 이슬람권에 공동 진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강구해야 한다.
사회적 통합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다인종·다문화적 배경을 외면하고, 서구식 민주주의의 잣대로만 말레이시아를 재단할 일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신(新)아시아 외교’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통합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남아는 하나가 아니다. 각국별로 세련된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야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쿠알라룸푸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