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헬스장 사고…
잦은 야근 후 뇌경색… 고용불안 불면증
산재 판결 점점 관대…
"사업주 부담만 늘어" 재계에선 볼멘소리
근로자들이 일하다 입은 산업재해에 따른 보상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법원에서 인정되는 '업무시간'의 범위는 보다 확대되고, '근로자'의 외연도 넓어지는 추세다. 업무와 재해의 인과관계 역시 새롭게 해석하는 판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비정규직이 800만명으로 추정될 정도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근로자가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법원이 근로자의 권리 보호 쪽에 보다 무게 중심을 두는 쪽으로 변화해가는 시도라고 법조계는 해석한다.
◆"고용불안 스트레스도 산재다"
대법원은 지난 10월 출근시간 전에 회사 체력단련장에 나와서 역기로 체력단련을 하다가 역기에 목이 눌려 숨진 육체노동자도 산재를 입은 것이라고 판결했다. 몸을 쓰는 직업이었던 만큼 업무를 잘하기 위한 체력단련이 필수적이고, 그 와중에 당한 사고는 업무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또 일용직 근로자가 일을 하기 전에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우다 화재로 숨진 일에 대해서도 "일을 하기 위한 준비행위로 일어난 사고"라면서 산재로 인정하기도 했다.
이밖에 질병과 업무의 연관관계에 대한 법원의 '낮아진 문턱'을 확인할 수 있는 판례들도 있다.
서울고법은 지난달 25일 24시간 영업하는 김밥집에서 19개월간 야간근무를 한 이모씨가 뇌경색을 앓게 된 것은 지속적인 야근 때문이라고 1심을 깨고 판결했다. 지난 8월 서울행정법원은 5년간 비정규직이던 윤모씨에 대해 "고용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생겨 숨졌다"며 산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현관 들어설 때까지는 퇴근 중"
대법원은 최근 퇴근길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숨진 육군 직원 이모씨 사건에서 "아파트 건물 현관이 아니라 자기 집 현관문에 들어서야만 퇴근은 종료된다"는 판례를 내놓았다. 지난 10월 서울고법 행정8부는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회사 정문을 이미 통과해 회사 구내도로에서 사고를 당한 경우에도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최근 법원의 판례에선 '업무시간'의 영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지난 8월 서울고법은 2차까지 이어진 폭탄주 회식 술자리가 끝난 뒤 술에 취해 집앞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사람도 산재 대상자로 봤다.
◆"골프장 캐디도 근로자"
법원이 산업재해 보상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근로자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수원지법은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도 법적인 권리를 갖는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캐디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입장이고, 그에 따라 산재 혜택도 받기 어려웠지만 다시 판단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올 들어 말을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마필관리사, 드라마 보조출연자(엑스트라), 속칭 '바지사장'도 산재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1심에서 기각된 산재 판결을 항소심에서 인정해주는 경우가 1심이 인정한 것을 기각하는 경우보다 3배쯤 되는 것 같다"면서 "경제규모가 커지고 직업이 다양화하면서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법원 판결의 추세도 계속 확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관대해진 판결에 재계는 불만
법원이 산업재해에 대해 인정하는 폭이 넓어지면서 재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한 관계자는 "법원이 온정주의에 치우쳐 보험금을 부담하는 사업주의 부담만 늘리고 있다"며 "산재 인정 폭이 넓어지면서 근로자들이 마구잡이로 산재 신청을 내 사업장에서 사업주와 근로자 간에 갈등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경총은 최근 노동법을 전공한 학자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에 대해 분석을 맡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외국 사례와 비교해 우리 법원이 산재를 인정하는 폭이 지나치게 넓다는 것을 입증해 향후 관련 소송에서 참고 자료로 쓰겠다는 취지다.
반면, 한국노동연구원 윤조덕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판결은 법원이 노동에 대해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고, 업무와 재해의 상관관계를 판단하는 데 있어 전문성을 갖춰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법원 판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