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음란한 진성여왕?

화이트보스 2009. 12. 12. 13:03

음란한 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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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2.12 03:05 / 수정 : 2009.12.12 11:21

'착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미소년에 사족을 못 쓴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 기록에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왕은 몰래 2~3명의 소년 미장부(美丈夫)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더니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겼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이다. 신라 세 명의 여왕 중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고 알려진 선덕·진덕여왕과는 달리 진성여왕은 망국(亡國)을 불러온 '팜므 파탈'처럼 여겨진다. '음란'과 '실정(失政)'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얘기다.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에게 배필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즉위 초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각간 벼슬의 위홍(魏弘)이었다. 도굴당했던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를 1966년에 되찾으면서 놀라운 비밀이 알려지게 됐다.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이었다!" 경문왕은 진성여왕의 아버지였으니 친삼촌이 정부(情夫)였던 것이 된다. 이 '삼촌'은 또한 여왕의 유모의 남편이기도 했다. 20세기에 '음란함' 한 건이 추가된 셈이다.

■친삼촌이 情夫… 당시 왕실선 근친혼 흔해

과연 그랬을까?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근친혼(近親婚)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는 고모와 결혼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인 동시에 사위였다. 이렇듯 도무지 촌수를 따지기 어렵게 되는 상황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인사상의 불합리성을 별도로 놓고 보면, '미소년과 사통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남성 군주가 두세 명의 '미소녀 후궁'을 데리고 있었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 정강왕이 죽기 직전 "내 누이는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남자와 같다"고 했던 것을 보면 여왕의 미모가 뛰어났던 것 같지는 않지만,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즉위하자마자 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하는 등 나름대로 선정(善政)을 위해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재위 3년째인 889년부터 파국이 시작됐다. 국고가 텅 비게 돼 지방에 세금을 독촉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국적인 농민반란을 불러왔다. 891년에는 궁예(弓裔)가 이끄는 군대가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휩쓸었고 892년에는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가 여왕의 재위 중에 끝나 버렸던 것이다. 다급해진 여왕은 894년 천재 유학파 최치원(崔致遠)이 올린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통해 개혁을 시도했다. 그 내용은 중앙집권의 강화와 골품을 초월한 인재 등용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귀족의 반대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를 자세히 보면 당시의 상황은 참담했다. 반란군이 도처에 들끓는 상황에서도 화랑들은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였다. 걸식하던 일반 농민들이 부잣집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났다.

어느 마을에 '효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집 한 채와 경비병력을 주고 '효양(孝養)마을'이라고 적은 문을 세워서 백성에게 홍보해야 할 정도로 나라 전체의 질서와 규범이 문란해진 상태였다(효녀 지은의 이야기).

■여성 아니었어도 모멸찬 평가 받았을까?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던 것일까? 학자들은 신라 쇠망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꼽는다.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경영, 소농의 몰락, 장기간의 평화로 인한 국민정신의 타락, 지역적 폐쇄성 등이다. 신라 하대(下代)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오로지 여왕에게만 돌린다는 것은 부당하다.

여왕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이 위홍 등에게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도록 한 일이다.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업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대의 유행가였던 향가 시구 중 불확실한 부분이 생겨났고 연회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사람마다 부르는 가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일종의 '노래방 가사집'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재위 11년째인 897년 6월 여왕은 자신의 부덕(不德)을 한탄하며 조카 요(嶢·효공왕)에게 양위했고 6개월 뒤 북궁(北宮)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여왕을 '폭군'이나 '성군'처럼 한마디 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난세에 권좌에 올라 상황을 타개하려 애썼으나 끝내 실패했던 불행한 군주였다. 역사에서 그런 왕은 너무나 많았다. 만약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음란'과 '실정'을 꾸짖은 사관(史官)의 모멸찬 붓끝이 그 앞에서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뒤로 1000년이 넘도록 한국사에서 두 번 다시 여왕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