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뼈로 해방 조국땅 처음 밟던 날
부산 거리는 태극기·만장으로 뒤덮였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뿌우, 뿌우.”
1946년 5월 15일 오전 9시 부산항. 일본에서 출발한 맥아더 사령부 소속 군함이 힘찬 고동을 울리며 닻을 내리자 군함에서 한 중년 신사가 하얀 상자를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순간, 수백 명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 서상한(徐相漢) 대표는 가슴에 품은 흰 상자를 힘껏 부둥켜안으며 중얼거렸다. “동지, 기뻐하시오. 그대가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선 땅이오.” 흰 두루마기에 둥근 안경을 쓴 백범 김구는 숨넘어갈 듯 달려와 “나요, 백범이오. 이제야 돌아오셨구려”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서상한 대표가 품고 있던 흰 상자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기념행사 무대에 폭탄을 던져 일제 군 수뇌부를 섬멸한 독립투사.
당시 윤 의사의 폭탄에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사망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할 만큼 윤 의사의 의거는 일제 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윤 의사는 당시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27분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미쓰코우지(三小牛) 공병작업장에서 총살 당했다.
이날 서상한 대표가 일본에서 옮겨온 윤 의사의 유골은 일제가 암매장한 윤 의사의 시신을 어렵게 찾아내 수습한 것이었다. 일제는 윤 의사 총살 당일 “사형집행 후 화장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윤봉길이 암매장됐다”는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윤 의사와 함께 ‘상하이 의거’를 기획했던 백범 김구 역시 윤 의사 시신 처리에 대한 일제의 발표에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백범은 1945년 11월 환국하자마자 윤봉길 유족들을 만나 “반드시 유해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고, 곧장 일본에 있는 애국지사 박열(朴烈), 이강훈(李康勳), 서상한에게 유해 발굴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1946년 3월 4일부터 재일동포 청년들과 사형장 근방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강훈은 당시 유해발굴 작업과 관련, “묘지관리인들이 ‘모르쇠’로 일관해 ‘이 부락의 모든 묘를 파보겠다’고 협박했다”며 “그제야 사형 당시 형무소 간수였던 시게하라(重元)라는 사람이 매장지를 가르쳐줬다”고 증언했다. 시게하라가 가리킨 매장지는 놀랍게도 행인들이 늘 지나는 쓰레기장 근처 평지였다.
재일동포 청년들이 반신반의하며 땅을 파자 윤 의사가 사형 당시 묶여있던 십자가 모형의 나무형틀과 윤 의사의 구두, 목재 관(棺)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훗날 공개된 일본 육군성의 극비문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의하면 일본군은 윤 의사 사형집행 직후 시신을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 묻었다. 시신이 묻힌 2m 깊이의 구덩이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뒀고,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였다.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 조국의 품에 안긴 윤 의사 유골함은 바로 차에 실려 부산 용두산 밑에 있는 동광국민학교(현 부산 영화체험박물관 부지) 빈소에 안치됐다. 윤 의사 유골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발굴된 이봉창, 백정기 등 애국지사들의 유골과 함께 도착했는데, 이들의 유골은 동광국민학교 빈소에 한 달간 안치된 후 합동추도식이 열렸다.
1946년 6월 15일,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시민과 학생, 만장을 든 각종 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열기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비록 정부 수립 이전이지만 일제의 압제에서 막 벗어난 때인 만큼 애국지사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그만큼 순수하고 뜨거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윤 의사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유골은 합동추도식 다음날 오전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 편으로 서울로 옮겨져 종로 태고사(현 조계사) 빈소에 안치됐다. 이후 윤 의사는 7월 7일 광복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 엄수된 가운데 용산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잠들었다.
주간조선은 윤봉길 의사 서거 77주년(12월 19일)을 맞아 윤 의사 유족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로부터 당시 부산 합동추도식과 윤 의사 유품을 담은 미공개 사진들을 입수했다. 부산 합동추도식 장면을 담은 사진은 몇 장이 전해져 왔지만 이번처럼 다채로운 모습이 담긴 미공개 사진들이 한꺼번에 공개된 적은 없다. 이번에 공개된 9장의 흑백 사진에는 윤 의사가 묶였던 십자형틀을 앞세운 추모 행렬과 각종 사회단체의 만장들, 추모행렬을 따라 거리에 도열한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당시의 추모 열기와 함께 광복 직후의 사회상까지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특히 윤 의사가 사형 집행 때까지 신고 있다가 시신과 함께 묻힌 구두 사진은 윤 의사의 체취가 풍기는 듯해 눈길을 끈다. 이 구두 사진을 제공한 윤 의사 조카인 윤주(62)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지도위원은 “2003년 작고한 이강훈 선생이 생전에 이 사진을 주며 유해 발굴 과정에 대한 증언을 들려줬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미공개 사진들에 대해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윤병석 매헌연구원장은 “윤봉길 의사의 서울 국민장 광경은 많이 알려졌지만 이번에 공개된 부산에서의 추모 행렬과 추도식 장면은 알려지지 않았다”며 “유해 환국 과정이 명확히 정리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도 “윤 의사가 백골이 돼 환국하는 벅찬 광경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며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이렇게 성대한 추도식이 열려 한마음으로 유족들의 응어리를 보듬어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진들”이라고 말했다.
십자형틀 앞세우고 추도식장으로
1946년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순국선열 합동 추도식의 추모 행렬. 윤봉길 의사가 사형 당시 묶여있던 십자형틀을 든 남학생과 조화를 든 여학생을 필두로 부산 남녀 중학생 대표 400여명이 선두에 섰다. 십자형틀은 윤 의사 시신과 함께 일본에 암매장돼 있던 것을 찾아내 유골과 함께 갖고 왔다.
추도식장으로 향하는 각종 사회단체들의 만장행렬.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을 주도했던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의 만장이 가장 앞에 보인다. 정부수립 이전이지만 당시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애국지사들에 대한 추모열기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리에 도열해 있다 추모 행렬이 지나가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등학생들. 당시 추모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 곳곳에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부산 공설운동장 추도식장에 도착해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다. 국군 창설 이전이지만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도열해 나름대로 의전 격식을 차리고 있다. 추도식 두 달 전 윤봉길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의 한 행사장에서 “내가 윤봉길 의사를 죽였다”며 통곡했던 백범은 이날 담담히 추도사를 읽었다고 한다.
분향 마치고 나서는 백범 김구
일본에서 봉환된 윤봉길 의사 유골이 한 달간 안치됐던 부산 동광국민학교(현 부산 영화체험박물관 부지) 빈소에서 분향을 마치고 나온 백범 김구. 이 빈소에는 윤 의사의 유골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발굴된 이봉창, 백정기 등 여타 애국지사들의 유골도 안치돼 있었다.
(좌)만장에 둘러싸인 십자형틀
추도식장 연단에 놓인 순국선열 영정과 윤 의사가 묶여있던 십자형틀. 영정은 이봉창 의사의 것만 사진에 찍혀 있다. 왼쪽 하단의 ‘무정부주의자연맹’ 글귀가 적힌 만장이 눈에 띈다.
(우)분향소 지키고 있는 윤 의사 동생
추도식장의 순국선열 영정 앞에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참배객. 윤봉길 의사의 동생인 윤남의(흰색 양복 입은 사람)가 참배객 뒤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다.
연설하는 김구… 유해 싣고 서울로
순국선열 유해를 싣고 서울로 향하는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 앞에서 연설을 하는 백범 김구. 부산역에서 출발하기 전의 모습인지, 중간에 정차한 역에서 잠시 내릴 때의 모습인지 확실하지 않다.
시신과 함께 발굴된 윤 의사의 구두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에 앞장섰던 독립투사 이강훈씨와 그가 공개한 윤 의사 구두. 1946년 3월 6일 일본에서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한 후 4월 25일 유품을 갖고 먼저 귀국해 찍은 사진이다. 윤 의사 시신과 함께 발굴된 구두는 윤 의사가 의거 당시부터 사형 집행 때까지 신고 있던 것으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의사 거의기념대회’ 때 분실돼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강훈씨 손에 들린 신문은 1932년 12월 19일자 일본 기타쿠니(北國)신문으로 1면에 윤봉길 의사 사형 집행 소식을 담고 있다. 신문 좌측 상단 사진이 수감 당시 윤 의사의 모습이며, 우측 사진은 사형집행 장소를 촬영한 것이다. 2003년 타계한 이강훈씨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폭사시키려다 체포돼 일본에서 12년간 옥살이를 한 인물로,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 발굴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