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朴대통령, 세계최대 중화학공단 개발 지시… 10·26으로 무산
대규모 항만 천혜의 입지 공주일대 행정수도 전제로 국토개조 차원서 추진
"계획대로 개발됐으면 중국 초고속성장 맞물려 두바이도 제쳤을 것"
두바이 국영기업 '두바이월드'의 채무 불이행 선언으로 27일 한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 증시가 급락했다. 작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 이후 안정세를 찾아가던 세계 금융시장이 이번 두바이발(發) 쇼크로 다시 불안에 빠지는 분위기다. 본지 11월 28일자 보도1978년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가 충남 서산의 동쪽 해안가를 날았다. 헬기 안에서는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황금산(152m)·봉산(69m)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현재 서산시 팔봉면·지곡면·대산읍과 태안군 이원면·원북면·태안읍 등으로 둘러싸인 가로림만(加露林灣)의 북단이다. 공중에서 한 바퀴 둘러본 박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하도록 하지." 이날 동행했던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은 귀경하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의 돌산을 사들였다. 가로림만이 개발되면 공사를 위한 암석 수요가 커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 ▲ 30년 전 구상대로 추진됐더라면 가로림만의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싱가포르(오른쪽 사진)나 두바이를 훌쩍 뛰어넘는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을까. 지난 7일 충남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에서 바라본 가로림만. 물이 빠진 갯벌 위에 어선들이 흩어져 있다. /곽수근 기자, 싱가포르 관광청
6일 오후 충남 서산시 독곶리 해변. 31년전 박 대통령 일행이 내려다봤던 그 장소에 섰다. 예나 지금이나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해질 무렵이어서 인적은 드물었고 어선들도 해변에 머물러 있었다.
'어민 외 출입을 제한한다'는 푯말이 눈에 띄었다. 가로림만을 등지고 북쪽을 보니 바닷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우뚝 솟은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정유가 자리한 중화학 공단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정작 상전벽해(桑田碧海), 세계 최초의 '두바이'나 '싱가포르'를 꿈꿨던 가로림만은 그대로였다. 가로림만은 도대체 어떤 꿈을 꿨고 왜 그 꿈이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을까.
◆가로림만이 행정수도와 관련 있다?
7일 낮 충남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 바닷가. 독곶리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곳으로 가로림만의 허리쯤 되는 위치다. 썰물이 빠져나간 이곳은 갯벌 천지였다. 북으로 900여m 떨어진 저섬은 섬이라기보다 동네 야산처럼 보였다.
가로림만 구상 이전인 1977년 2월10일 박 대통령은 서울시청 순시에서 임시행정수도 논의를 꺼냈다. 수도권 인구 억제와 북한의 기습을 완충한다는 취지에서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예정지로 꼽혔던 곳이 지금의 세종시에서 서쪽으로 불과 5㎞쯤 떨어진 충남 공주군 장기면 일대다.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수도 이전을 공주군 일대로 가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서울에 대한 인천의 역할처럼 장기면이라는 내륙의 행정수도에는 가로림만 같은 항만 입지가 필요했다. 가로림만 남동쪽에 위치한 공주군 장기면은 직선거리로 90여㎞쯤 떨어져 있다.
게다가 1977년 12월 당초 목표보다 3년 빨리 연간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 박정희 정부는 포항종합제철의 뒤를 이을 제2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가로림 프로젝트)'은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이에 따른 물류 편의 등을 고려해 나온 국토개조 방안의 하나였다.
◆싱가포르·두바이 능가했을까
'이슬숲'이란 뜻을 지닌 가로림만은 내륙으로 깊이 파고든 형태여서 천혜의 항만 입지다. 남북간 직선거리가 16㎞, 동서간 최대거리도 9㎞ 이상이다. 1978년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은 가로림만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 창원공단 10배 규모를 들일 수 있는 대(大) 항만 입지를 알아보다 가로림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싱가포르를 뛰어넘는 동양 최대의 항구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서해 최대였던 중국 상하이항이 수심 10m 이하인 데 비해 가로림만은 수심이 20m 이상이어서 20만t급 선박도 오갈 수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로림만 주변에는 미개발 토지가 수두룩했다.
오 수석은 이런 곳들을 공장이나 주택용지로 쓰면 최대 800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배후도시도 가능할 것으로 봤다. 692㎢에 400여만명이 사는 싱가포르쯤은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는 "싱가포르의 2배 정도인 항만과 공업지구가 생기는 셈이며 중부지방과 호남권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해 이들 지역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가로림만 일대를 독립국 수준의 경제특구로 만들어 생필품과 외국인 노동력 수입 등을 자유화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자는 주장도 있었다. 오늘날 인천·광양만 등의 경제자유구역보다 한발 더 나간 개념도 있다.
당시 계획대로 됐다면 이곳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는 됐을 것이라고 오 전 수석은 생각한다. 가로림만 일대가 국내총생산의 30%를 도맡음과 동시에 외국 금융기관도 대거 유치, 오늘날 중동의 금융·무역 허브(hub)인 두바이도 제쳤을 것이란 얘기다.
◆펼치지 못한 꿈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좌초한 이후 진행된 주변 상황은 30년 전 전망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성장에 따른 교역량 폭증으로 서해 물동량이 크게 늘었다. 그만큼 서해의 대항만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반면 동해의 부산항은 상하이 양산항 등의 약진으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도 개통돼 수도권과 가로림만 일대의 접근성도 개선됐다. 프로젝트대로 인천·아산·군산·목포·여수와 가로림만을 잇는 서부공업벨트가 구축됐다면, 포항·울산 등 동남공업벨트와 함께 두 축으로 고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31년 전 구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산업단지를 염두에 뒀다. 500만평 부지에 연간 2000만t 생산능력을 가진 종합제철소를 비롯,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기계공업 단지를 820만평 부지에 마련한다는 식이었다.
연산(年産) 50만대인 자동차공장(120만평) 비철금속(240만평) 철강 관련산업(360만평), 석유화학(300만평)을 조성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중화학 공업을 총망라하는 것으로, 이 경우 가로림만 물동량은 5400여만t으로 추산됐다.
31년 전 박 대통령이 이곳을 돌아본 이후 가로림만 일대는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성됐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다녀온 날 박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그가 10·26 전날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던 '2000년대의 국토구상' 보고서에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담겨 있었다.
◆다시 꾸는 꿈은?
몇 년 전부터 가로림만 일대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가로림만 일대 북부권역을 물류·유통·정밀화학·자동차산업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계획과,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논란이다.
전자는 이곳을 중화학공단으로 키우겠다는 30여 년 전 정부 구상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이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것이라 일부 권역에 한정돼 있다.
2004년 서산시는 가로림만 북쪽 대산항 일대에 물류기지를 구축하고 배후산업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작년에는 미래혁신단지 조성이라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2015년까지 총 1조 6000억원을 들여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과 오지리 벌말 사이의 가로림만 연안에 제2대산항과 자동차·중화학 산업단지를 들인다는 계획인데 실현 여부는 두고 봐야 할 전망이다.
서산시는 "현재 연구 용역중"이라고 말했다. 10여년 전에는 대산읍과 석운면 사이 가로림만 수백만평을 매립해 제철소를 들이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환경파괴 논란과 어민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가로림만 북쪽의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와 태안 내리간 2㎞ 구간에 520MW 조력발전소를 만들어 잇자는 계획은 탄력을 받았다. 지난달 가로림 조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공유수면 매립계획이 국토해양부 심의를 통과했다. 1979년 5월에도 시설용량 20만~30만㎾ 규모 조력발전소를 가로림만에 들이자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화력·원자력 발전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주민들 반발은 여전하다. 조력발전소가 생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유다. 발전소 건설로 갯벌이 훼손되면 어획량도 크게 줄어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는 우려도 많다. 가로림민 일대 어민들은 요즘도 조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며 항의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