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부품 조달해온 동아시아국중국 기술력 발전으로 위기 봉착…한국·대만 같은 기술 우위 국가들은중국과의 기술력 격차를 더 벌려야서로 보완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미국과 견줄 만한 규모의 경제가 바로 코앞에서 생기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엄청난 충격과 위협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발전 속도가 경이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급속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경우 주변 국가들은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중국은 동아시아 경제의 맹주 지위를 오랫동안 차지해 왔던 일본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전해왔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 국가들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본은 이미 동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이었고, 여타 동아시아국보다 몇 발자국 앞서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저개발국으로 대했다. 특히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관계에서 막대한 무역흑자를 이루었다. 즉 일본은 전체 수출의 반 가까이를 동아시아 국가에 하고 있는 반면, 이들 국가로부터의 수입은 이보다 훨씬 적어 전체의 40% 정도에 그친다.
반면 중국은 전체 수출의 37%를 동아시아 국가에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수입은 42%에 달한다. 따라서 중국은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 무역적자를 감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러한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우리나라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이 수입의 2배에 가까워 엄청난 무역흑자를 누리지만, 중국은 오히려 우리나라로부터의 수입이 수출의 2배에 가까워 우리나라로부터 엄청난 무역적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낮은 국가들의 상황은 다르다. 이런 나라들은 중국 경제가 부각됨에 따라 직접투자 유치의 기회가 줄어드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제3국가 시장에 대한 수출에서도 중국에 밀려나는 등 고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중국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발전이 동아시아 전체에 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디커플링이 성립하지 않았던 이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발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이라는 이름 아래 신화화된 바 있다.
그러나 2008년 후반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자 세계 무역이 급속하게 축소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도 동반 추락했다.
디커플링이 성립하지 않았던 것은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된 데도 기인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 무역 패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무역 패턴은 '최종 수요자인 미국―조립공장으로서의 중국―부품 조달자로서의 동아시아 주변국'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경제의 부상과 함께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생산 공정 분담(production sharing)' 방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생산 공정 중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조립 부분만을 떼어내서 중국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TV의 생산 과정을 생각해 보자. 보다 높은 기술이 필요한 주요 부품은 기술력이 높은 한국이나 대만 등 주변국에서 생산하지만, 이를 단순 조립하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은 중국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끊임없이 부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의 수입품에서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40% 정도인 데 비해 중국의 수출품 중에서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중국의 막대한 부품 수요의 배경에는 완성품에 대한 최종 수요자인 미국의 소비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최종 수요가 있었기에 중국은 조립공장으로서의 역할을 키워나갔고, 그와 함께 부품 조달자로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도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주변국으로부터 부품 수입에 따른 무역적자를 미국에 대한 막대한 양의 소비재 무역흑자로 메웠다.
하지만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급격한 경기 침체를 겪자 최종 수요자인 미국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줄어들고, 중국 역시 주변국으로부터 부품 수입을 줄이게 됨에 따라 미국의 경기 침체가 동아시아 국가 전반으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변화
그런데 최근 중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변화들이 보이고 있다.
첫째, 중국이 자체적으로 최종 수요자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중국의 수출은 미국 경제 침체로 20% 이상 감소했지만, 수입은 훨씬 덜 줄었다. 또한 중국 내 소비와 투자는 위기 전보다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막대한 정부 지출이 행해지고 내수 경제가 커지고 있으며, 이것이 다시 주변국 제품에 대한 수요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에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중국의 기술력이 향상됨에 따라 부품을 자체 제작하고 주변으로부터의 부품 수입을 줄이려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중국이 더 이상 거대한 조립공장의 역할만 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주변국들에 위협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중국 위안화의 대(對)달러 환율이 실질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중국 위안화의 가치도 동반 하락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지나치게 강화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앞으로 중국의 경제 발전이 주변국들에 결코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나라처럼 아직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호주와 같이 확실한 원자재 수출 품목이 있는 주변국들은 중국의 수요 창출로 더욱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들 나라들이 이번 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기술적 우위가 별로 없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과 같은 나라에는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 강화가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사실 이들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중국과 힘겹게 경쟁하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혜택을 누려왔는데, 앞으로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확실하게 밀리면서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중국 경제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재앙이 아닌 커다란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술력이 중국에 비해 확실한 우위에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이 경쟁자가 아니라 우리 경제와 보완관계를 유지하며 같이 번영할 수 있는 고마운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