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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죽을 권리 어디까지 허용되나

화이트보스 2009. 12. 27. 20:38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 어디까지 허용되나

김성수 변호사
미리 쓰는 유언장이라는 것이 있다. 대개는 살면서 가깝게 지냈던 분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다. 매장의 풍습에서 벗어나 화장을 부탁하기도 한다. 의식불명이 되어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장기간 식물인간 상태에 빠질 경우에 인공호흡기나 인공급식관 등을 통한 생명연장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미리 적어두는 경우도 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장기간 누워서 목숨만을 유지하는 경우가 간혹 생기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는 장기간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어느 날 벌떡 일어나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다. 일단 사람과 사물을 분별하는 뇌 부분은 한번 손상을 받으면 현대의학으로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물인간 상태에서 짧게는 수십일 길게는 수십년씩 지내기도 한다. 급식관을 통하여 영양분과 물을 보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소생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한정 인공급식을 유지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이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지난해 시작된 김모 할머니 가족들의 연명치료 중단 소송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었을 것이다. 이미 70세를 훌쩍 넘으신 나이에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기약 없는 삶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여 차라리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대법원에까지 진행된 소송에서 결국 인공호흡기 제거가 허용된다는 판결이 확정되었다. 가족들은 인공호흡기만을 제거하였고 급식관을 통한 영양공급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만일 당사자가 평소에 “내가 한달 이상 의식불명 상태가 계속되고, 의사가 식물인간 상태라고 진단을 하게 된다면 나에게 인공호흡기나 급식관을 통하여 무리한 생명연장을 하지 마라. 나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정히 판단이 어려우면 나에 대한 치료의 지속 여부나 내용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자녀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라.” 는 내용을 자식들에게 편지 형식이나 유언장으로 작성해 두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고통의 시간이 조금은 단축되었을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하여 식물인간 상태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다양한 법적 시도가 이루어졌다. 먼저 1969년 초에 루이스 쿠트너라는 변호사가 “생전유언(living will) 제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의식불명 상태에 대비하여 평소에 인공호흡기에 의한 연명치료 등 비통상적인 치료를 거부한다는 등의 내용을 정해두고 이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문서를 작성해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76년에 뉴저지주 대법원은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죽어가는 환자에게 생전의 의사에 기초하여 생명유지 수단을 제거함으로써 환자를 죽게 하는 것은 헌법상 프라이버시권에 포함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22세인 여자 환자 카렌 퀸란의 후견인으로 임명된 아버지의 요구로 인공호흡기가 제거되었다. 그런데 인공호흡기 제거 후에도 카렌 퀸란은 10년이 넘도록 생존을 계속하다가 1986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소송 당시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다.

그 후 1990년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죽어가는 환자의 치료 중단에 관한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연방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었다. 미주리주에 살던 24세 여자인 낸시 크루잔은 교통사고로 7년간이나 지속된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낸시의 부모는 카렌 퀸란 사건의 사례에 따라 생명유지장치인 급식관의 제거를 병원에 요구하였다. 병원은 법원의 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미주리주의 하급심은 크루잔 부모의 연명치료 중단 청구를 인용하였으나 상급심인 미주리주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였다. 낸시의 연명치료 거부에 관한 ‘생전유언(living will)’이 제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낸시의 의사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경우에는 “명백하고 확신할 만한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가 있어야 하는데 가족들에게 한 몇마디 말만으로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낸시의 부모는 연방대법원에 최종 판단을 구하였다.

그 결과 연방대법원은 치료를 거부할 경우 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판단능력이 있는 환자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가 있고 급식관을 제거하는 것을 인공호흡기 제거와 달리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의 생전 의사를 확인함에 있어서 생전유언과 같은 “명백하고 확신할 만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미주리주 대법원의 판단은 타당하다고 하면서 낸시 부모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그 이후 낸시가 평소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말을 들은 친구들의 증언이 새로이 제출되면서 진행된 새로운 소송을 통하여 결국 급식관이 제거되어 낸시는 사망하게 되었다.

크루잔 판결이 있었던 1990년에 27세 여자 테리 샤이보우가 전해질 불균형으로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테리는 급식관을 통하여 영양과 수분을 공급받으면서 7년 이상 연명을 하였다. 테리의 남편인 마이클 샤이보우는 1998년에 테리의 급식관을 제거하여 자연스런 사망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플로리다주 법원은 마이클의 소송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테리의 친정 부모는 법원의 결정에 반발하면서 테리는 식물인간이 아니고 자신들이 찾아가면 약간의 감탄사를 내거나 눈을 깜박인다고 하면서 급식관을 재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두번에 걸친 급식관의 제거와 재설치를 하면서 테리의 남편과 친정부모 사이에 기나긴 소송은 남편의 승소로 끝났다. 테리의 친정 부모 입장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의 요구로 플로리다주 및 연방의 의회를 통하여 테리 특별법까지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권력분립에 반하는 위헌법률이라는 취지로 배척하였다. 결국 테리는 급식관을 제거한후 10여일만인 2005년 3월 31일에 사망하였다. 부검결과 테리는 뇌질량이 정상에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한다.

결국 급식관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테리가 소생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상의 사례를 보면 갑작스러운 사고 등으로 의식불명이 되면서 식물인간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젊은 나이만 생각하여 생전유언 같은 걸 작성해 두지 않았던 상태에서 남은 가족들이 겪은 고통 그리고 자신이 겪은 고통은 작지 않다.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가 기약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이제 자연스런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사전 준비가 절실한 때이다.

김성수 변호사(법무법인 지평지성 변호사,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