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체 '조경수 확보' 전쟁 아파트 가격·분양 성패 좌우
물량 품귀에 값 40% 뛰어 명품 찾으려 전국 돌며 발품
경기 고양에서 4000가구가 넘는 아파트를 짓고 있는 디에스디삼호㈜의 최동호 상무는 1주일에 닷새는 지방을 떠돈다. 3년째 아파트 조경용으로 심을 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는 것. 최 상무는 이달 6일에도 전화 한 통을 받고 전북 정읍으로 달려갔다. 현지의 한 농장에서 "좋은 소나무가 있다"는 연락이 온 것. 농장주는 지름 40㎝짜리 고급 소나무 20그루에 5억원을 불렀다. 그루당 2500만원인 셈이다. 최 상무는 "너무 비싸다"며 발길을 돌렸다.아파트 건설 현장에 때아닌 '나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건설사마다 조경 차별화를 통한 아파트 고급화 경쟁을 하면서 좋은 나무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소나무·느티나무 등 조경수로 각광 받는 고급 수종은 가격이 1년 전보다 30~40% 치솟았다. 웬만한 고급 소나무 1그루값은 2000만원을 넘어 중형 승용차 1대값과 맞먹는다. 그나마 물량이 없어 상당수 아파트는 목표 수량의 50~60%도 확보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작년 7월 입주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는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아파트 인지도가 급등했다.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경북 고령에서 1000년 된 느티나무를 10억원을 주고 사다 심었던 것. 이 나무는 아파트 조경수로는 최초로 보호수 지정이 추진되는 등 화제를 뿌렸다.
입주민 홍모(38)씨는 "천년 고목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아파트 가격도 좀 오른 것 같고, 주변에서도 상당히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도심에선 드물게 녹지율이 40%에 육박하는 서울 서초 '반포자이' 아파트도 고급 소나무만 1200여그루를 심으면서 단지 고급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건설사들이 조경수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아파트 단지의 품질 고급화와 차별화에 필수적인 탓이다. 건설업계는 1998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마감재·인테리어·내부구조 등에서 품질 차별화를 끊임없이 추진했다. 그러나 소비자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녹색(green) 열풍이 주택 시장까지 확산되면서 조경 특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
- ▲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수령(樹齡) 1000년된 느티나무가 식재된 서울 반포동‘래미안 퍼스트지’. 이 나무는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경북 고령에서 10억원을 주고 옮겨 심었다.
현재 법정 조경 수량은 교목(키큰 나무) 기준으로 1㎡당 0.2그루, 관목(꽃나무 등 키작은 나무)은 1그루. 아파트 1000가구에 교목만 대략 800~1000그루가 필요하다. 조경수 확보에 들어가는 비용도 전체 공사비의 2~3%를 차지한다.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에 지은 '우미린' 아파트는 조경비만 100억원이 투입됐다. 고양 일산에 짓는 '일산자이'는 평균 1000만원이 넘는 대적송 등 명품 소나무만 2200여그루를 확보하는 등 소나무값으로만 5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 ▲ 1그루당 평균 1000만원이 넘는 소나무 2200여그루를 심어 놓은 경기 고양‘일산 자 이’아파트. 올 하반기 입주할 이 아파트에는 소나무값으로만 500억여원이 투입된다./디에스디삼호㈜ 제공
현재 조경용으로 많이 쓰이는 나무는 소나무 외에 낙엽수인 느티나무·벚나무·이팝나무 등이다. 이들 수종의 가격은 매년 뛰어 1년 전보다 평균 30% 이상 올랐다.
아파트 단지 내 가로수로 선호되는 느티나무는 지름 1m 이상이면 5000만원을 넘고, 벚나무(지름 20㎝짜리)도 최소 100만원은 줘야 구할 수 있다.
값이 비싼 이유는 공급 부족 탓이다. 조경용 나무는 예술미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나무는 인공적으로 키우기 어려워 야산 등에 자생하는 나무를 채취해야 한다.
문제는 채취가 까다롭다는 것. 주로 고속도로나 공항, 산업단지, 댐 등 대형 국책사업을 진행할 때만 제한적으로 채취가 허가된다. 조경전문가인 배상일씨는 "갈수록 대형 공사가 감소해 조경수 확보가 힘들어지고 있다"며 "4~5년 후에는 아파트에 쓸 만한 소나무를 야산에서 직접 조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런 나무를 인공 재배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름 20㎝짜리 소나무 1그루를 키우는 데만 최소 30년 이상이 걸린다. 일부에서는 큰 나무, 좋은 나무만 고집하지 말고 어린 나무를 심어 제대로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외국에선 아파트 조경용으로 지름 20㎝ 미만 나무를 쓰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