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천석·主筆
세종시로 맞선 두 주장 '진실의 근수' 달아 정리해야
세종시 문제 드잡이 더 가면 한 하늘 이고 못산다
정치인이란 자기네에게 표를 몰아주기만 하면 "국민은 언제나 옳다" "국민은 현명하다" "국민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라고 온갖 말로 구슬리다가도 다음 선거에서 지지를 다른 쪽으로 옮기기만 하면 "하늘도 때론 이상한 소리를 낸다"고 툴툴대며 국민을 헹가래쳤던 손을 치워버리는 사람들이다. 국민들이 '우리가 정말 옳고 현명한가'라고 되묻게 되는 건 엉덩방아를 찧으며 꿈에서 깨나는 이 순간이다.
1976년 영국에서 2차대전 때 비밀문서 일부가 공개되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1940년 11월 14일 늦은 밤 히틀러의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버밍엄 남쪽의 고도(古都) 코번트리시(市)에 폭격을 퍼부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야간 기습폭격으로 시민 수백명이 미처 대피할 틈도 없이 폭탄에 맞아 혹은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비밀문서 공개 전까지는 이 사건은 독일 공군이 1940년 9월에서 1941년 5월 사이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5만t의 폭탄을 투하해 4만2000여명 민간인 목숨을 앗아간 대공습의 한 토막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런데 비밀문서 공개를 통해, 영국이 코번트리 폭격 몇 시간 전 절대로 해독(解讀) 불가능하다고 독일이 자신하고 있던 독일군 암호(暗號)를 풀어내 폭격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당연히 정부가 제때 대피명령만 내렸어도 시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무자비하고 무책임한 정부가 어디 있느냐는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국인' 처칠은 죽은 지 11년 만에 웨스트민스터 묘지에서 끌려나와 세상의 뭇매를 맞았다.
그러나 처칠의 수모(受侮)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 당시의 정부 당국자, 2차대전을 연구해온 대학교수, 언론이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처칠의 판단이 옳았다고 변호(辯護)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처칠 변호론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처칠이 한밤에 대피명령을 내렸다 해도 불과 몇 시간 안에 20여만명 시민이 몸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관객이 꽉 들어찬 깜깜한 영화관에서 '불이야!' 하고 외치는 것처럼 혼란을 부채질해 희생만 키웠으리라는 반론(反論)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들의 심야(深夜) 대피 소동은 곧바로 독일에 알려질 텐데, 그러면 독일은 암호가 해독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암호를 바꿔버렸을 것이며, 이것은 전쟁이 진짜 중대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영국의 전쟁 대처 능력을 심각할 정도로 망가뜨렸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각계 지식인들은 내 편 네 편의 어깨동무를 풀고 좌·우파와 여당·야당의 경계를 넘어서서 처칠 비판의 거센 여론 흐름을 거슬러가며 차분하게 자신의 판단과 소신을 밝혔다. 국민 역시 한때의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처칠 비판론'과 '변호론'을 저울에 달아본 후 '변호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코번트리 소동은 몇 달 안 가 막을 내렸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어찌 됐을까.
세종시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 꽃이 피고 지기를 여덟 차례나 거듭했는데도 불길이 꺼지기는커녕 불꽃을 튕기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근처로 타들어 가고 있다. 이러다간 두 사람 모두 정치적 화상(火傷)을 입게 될 판이다. 어떤 다툼이든 어느 한쪽이 확실히 옳고 다른 한쪽이 분명히 그르다면 얼마 안 가 제풀에 주저앉는다. 세종시 논란이 이렇게 지루하게 이어진다는 것은 '정부 부처가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과 '옮겨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저마다 '몇 근(斤)의 진실'은 담고 있다는 이야기다.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진실에 잠시 담갔다 꺼낸 논리와 주장이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지도급 인사들은 코번트리 사건을 둘러싼 여러 주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진실의 근수'를 달아 공개함으로써 몇 달 만에 사태를 잠재웠다.
그러나 2010년 이 나라에선 저울을 들어야 할 손에 확성기를 쥔 사람들이 '너는 누구 편이냐'를 외쳐대며 대한민국을 '내 편이라면 모든 것이 옳다 하는 바보들'과 '남의 편이라면 모든 것이 그르다 하는 바보들'만 사는 '바보 공화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종시 갈등이 언젠가 권력을 내놓을 측과 언젠가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측의 드잡이라면, 한쪽은 공포로, 다른 한쪽은 이익으로 뭉쳐 똬리를 트는 건 시간문제다. 이 두 집단은 하늘이 두쪽 나도 한 하늘을 이고 살 순 없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앞날이 탄탄대로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세상 참 우습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