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고구려의 숨결을 느끼다

동명왕은 고구려 아닌 부여 시조?

화이트보스 2010. 2. 6. 09:40

동명왕은 고구려 아닌 부여 시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칭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주몽과 동명왕은 대체로 동일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고구려 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시조 주몽이 ‘추모성왕’으로 기록됐다. 또 ‘위략’과 ‘후한서’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는 동명왕을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 시조로 기록한다.
KBS ‘역사스페셜’은 16일 오후 8시 ‘동명(東明) 루트를 찾아서’에서 부여의 건국 시조로 그려진 동명왕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역사서를 보면 부여는 전성기 때 인구 8만호에 사방 2천리의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당시 인구 3만호에 불과한 고구려보다 국력이 훨씬 강대한 나라였다.
또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물인 세형동검을 사용할 때, 부여는 수준 높은 철제 무기를 사용한 군사 강국이었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부여를 세운 동명왕은 ‘탁리국’에서 남하해 ‘엄호수’를 지나 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프로그램은 ‘탁리국’과 그의 남하 루트를 찾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유현에서 송화강을 건너 길림까지 약 3천㎞를 탐사해 그가 걸었던 자취를 추적한다.
또 고구려 주몽이 부여 동명왕과 동일시된 것은 고구려가 부여 동명의 건국신화를 차용해 부여를 계승하는 의식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소개한다.
실제로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도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으며, 가야와 발해는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프로그램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