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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여 도의 추위가 몇 주간이나 계속 되고 중부지방의 혹한과 폭설 탓에 온통 거리가 어수선하다.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도 제설작업이 덜 끝나 차량들이 튀어오른 흙물로 온통 지저분하다.
30여 년 동안 지리산을 매달 둘러봐온 필자가 오늘은 지리산 사람들의 겨울 이야기를 들으러 지리산을 찾아간다. 10여 년 전 ‘지리산-못 다한 이야기’를 <월간山>에 연재하며 만났던 많은 노인분들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지리산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이자 주봉인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무난한 길이 시작되는 백무동과 인근 추성동마을 분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따라 육십령터널을 지났다. 이곳을 지나면 함양 군내가 된다. 올려다보이는 덕유산 능선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부는 강풍으로 능선이 분설에 갇혀 사라진다.
- ▲ 이정수옹(왼쪽)과 문호성씨.
- 오랜 지인으로 백무동에서 느티나무산장을 운영하는 문호성(57)씨 댁을 찾았다. 문씨는 그동안 함양 군의원을 지냈고 지금도 마천군 향토지 일을 맡아 군내 사정이 밝고 마을사람들과의 교류가 돈독했다. 문씨의 안내로 인근 추성동으로 향했다.
백무동 일대는 중부지방보다 눈이 훨씬 덜 내렸다고 한다. 건너다보이는 양지 바른 산기슭에는 잔설만 조금씩 눈에 띄었다. 추성동 앞에 걸려 있는 임천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추위 탓인지 인적이 드물다. 추성동 마을회관에는 한겨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십여 분의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계셨다. 10여 년 전 이장이었던 석덕완 할아버지의 부인 이방강 할머니도 계셔서 반가웠다. 석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세상을 뜨셨다 했다.
당시 석 할아버지는 9대째 지리산에 살고 있었고 조상은 명나라 병부상서를 지낸 이로 청나라에 쫓겨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눈이 반도 오지 않아.”
노인분들께 산중의 겨울나기에 대해 여쭈었다. 임천 건너 창원리가 고향인 정상임 할머니는 18세 때 결혼해서 가마를 타고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던 추성리로 들어왔다.
50여 년 전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다. 고무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다녔는데 너무 추웠다고 하신다. 힘든 살림에 새색시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을까. 마천장이 없던 시절 등구재 넘어 인월장에 다닐 무렵, 겨울 추위에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산중에서 얼어 돌아가시는 것을 보기도 했다.
다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진 목숨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는 분들. 해방 전후에는 겨울 식량이 없어 조, 수수, 상수리 열매를 쪄서 먹었고 버섯을 양잿물에 삶아 씻어 식량으로 사용했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눈이 반도 오지 않아.”
할머니는 말한다. 그러나 동네가 공동으로 쓰는 지하수나 계곡수는 다행히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엔 겨울에 집집마다 방에 앉아 새끼를 꼬아 짚신도 만들고 가마니도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산나물을 캐러 갈 때 쓰는 걸망태도 짚으로 만들었다.
나무를 엮어 만든 윤판집에는 구들을 놓아서 겨울에도 따뜻했고 밤에는 석유로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 요즘은 나일론 줄이 나와 새끼도 필요 없거니와 볏단을 기계로 수확하는 바람에 짚이 깨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함양장을 넘어 다니던 구양리 위쪽 오도재는 눈이 많이 오면 넘지를 못해 요즈음 민박인 주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던 산속엔 해방 전후 목기를 만들기 위해 남벌과 도벌로 큰 나무들이 잘려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즐비하던 숯가마 때문에 많은 나무들이 사라졌다.
논이 없고 밭이 대부분인 추성동은 요즈음 야생동물 탓에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행히 감나무가 많아 60일 정도 말린 곶감이 잘 팔린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에 비하면 요즈음 사람들은 고생이 덜해요. 요즘은 눈이 덜 오고 춥지도 않지요. 옛날에는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붙곤 했어요.”
- 창밖에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하나둘 자리를 뜨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추성동을 내려왔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억울하게 죽은 동네 사람들 비석이라도 세워 달라고 건의하고 계신다는 할아버지의 손에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에서 발행한 책자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백무동의 밤바람은 무서웠다. 오래전 묵었던 느티나무산장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꽁꽁 얼어 흐름을 멈춘 지 오랜 것 같다. 새로 지은 산장의 이층 창문으로는 한겨울의 잔설 풍경이 정겹게 느껴진다. 늘상 집을 떠나면 잠을 설치게 마련인가 보다.
산중 곳곳에 숯가마 서며 숲 크게 훼손
다음 날 아침 백무동의 역사에 대해 밝으신 84세의 이정수 할아버지를 찾았다. <월간山> 1998년 11월호에 필자가 쓴 ‘지리산 못다 한 이야기’에서 이 할아버지는 해박한 지식으로 백무동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께서 백무동 밑 고점이란 골짜기로 들어온 후 줄곧 그 후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점계곡은 지금도 쇳물 녹아내린 흔적이 있는 곳으로,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 19년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추성동 일대에서 거처할 때 각종 병기를 만들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에는 지리산 일대에 눈이 많이 내렸다. 한겨울 준비는 늘 땔감나무였다. 8세 때는 허리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왔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골짜기마다 들어선 숯굴에서 백탄과 금탄을 구었다. 백탄은 불이 잘 붙지 않으나 가스가 없고 오래 가서 사무실용으로 사용했고, 금탄은 가스가 많아 주로 야외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겨울엔 억새로 숯가마니를 만들었고 가마니 1개당 3전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것도 일본놈들은 사람 숫자대로 강제공출을 해서 마천다리까지 운반해줘야 했어.”
한겨울 식량은 수수, 조, 돼지감자, 고구마 등이었고 동네 지형상 큰 눈사태는 없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산에 먹을 것이 쌓여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진사 벼슬을 지낸 서병곤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5세 때부터 스승에게서 의학과 한문을 배웠다. 스승은 한 뿌리만 먹으면 허기를 면할 수 있는 귀한 약초를 알려주기도 했는데, 그 이름은 모르나 지금도 장터목산장 인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스승께서 ‘천지가 내 손 안에 있다’란 비서를 주면서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는데, 이 책을 동네 어른한테 빌려 주었다가 그 어른이 사흘 만에 돌아가시면서 유족들이 유품인 줄 알고 소각하는 바람에 없어졌어요”하며 그는 아쉬워했다.
그는 또한 백무동이란 한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스승께 들은 이야기로는 지리산에는 청학동과 백학동이 있는데 백학동은 지금의 백무동으로, 지금의 무(武)자는 원래 일제강점기에는 무(鵡)자로 써서 백학이라 불렸으나 1914년 일제가 개명할 때 새 조(鳥)자를 떼어 버렸다고 한다.
- ▲ 지리산에 수없이 많았던 반달가슴곰.
- 이정수 할아버지는 구례의 우종수씨, 함태식씨와 절친한 친구였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 동향 사람인 친구여서 “지리산에 산장을 지으면 등산객에게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여 1971년 지금의 장터목산장과 노고단, 치밭목, 세석산장을 지었다고 한다.
1년 후 산장에 올라가 보니 유리창은 다 깨지고 산장은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흘렀다. 양동이가 귀했던 시절, 이 할아버지는 양동이와 삽을 들고 올라가 장터목산장 관리를 시작했고 함태식씨는 노고단산장으로 갔다. 그 후 간단한 물건도 팔면서 관리되던 산장이었지만, 1976년 공단에서 관리인을 공단 사람으로 교체했다.
요즈음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에 솟아 있는 솟대의 또 다른 유래에 대해서도 구전돼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신다. 오랜 옛날 중국과 우리나라가 대적할 때 늘 우리나라가 이기곤 했다. 병사가 많았는데도 우리나라에 이기지 못해 답답해하던 중국 황제가 지혜 있는 신하를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신하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는 천주(天柱)가 있어서 우리가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중국 천자는 즉시 병사를 보내 천주를 부러뜨리라 명했다. 천주가 훼손되자 중국의 기세가 살아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당시의 임금이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신하를 시켜 중국의 곤륜산에 무쇠방아를 놓게 했다.
무쇠방아를 놓은 이후 중국의 여자들이 아이를 못 낳게 되고 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연을 들은 중국 황제가 신하들을 시켜 무쇠방아를 부수려고 했으나 당시 기술로는 그것을 부술 수가 없었다. 이에 중국 황제는 무쇠방아를 놓은 우리나라 사람을 불러와서 담판을 했다. 그러자 사신으로 간 사람이 우리나라의 개성에다 천주를 다시 세워주면 무쇠방아를 부수겠다고 했다. 그 후 중국은 쇠를 모아 우리나라에 무쇠기둥을 세워주게 됐고 중국의 무쇠방아도 사라지게 됐다.
실제 개성에는 중국을 바라보고 무쇠기둥이 세워졌고, 그 위엔 쇠로 만든 새가 만들어졌다. 앞으로 다시는 중국이 우리나라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배의 모양을 한 우리나라에 세워진 것은 솟대가 아니라 돛대라 불려야 된다고 하셨다.
천왕봉 오르는 길목 통천문 주변에는 언제부터인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란 뜻의 ‘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의 천왕봉 표지석이 있기 전에 그 자리엔 남명 조식 선생의 ‘만고에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뜻의 한시 시구를 적은 조그만 표석이 있었다.
백무동 입구 산 위엔 늘 호랑이가 앉았던 범바위 있어
문득 올려다 보이는 천왕봉은 오늘 따라 하늘이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지리산에 몇 안 되는 포수 중 한 사람이었다. 1977년까지만 해도 겨울 사냥철이면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고, 곰이 많아 사람들의 피해가 심했다. 할아버지는 직접 17마리의 곰을 잡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때는 학교 다녀오던 길에 백무동 어귀에서 호랑이와 마주치기도 했단다. 지금도 백무동 입구 산 위쪽으로는 늘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는 바위가 있어 동네 사람들이 범바위라 부르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관에서 엽총을 전부 수거해 가서 이후 날카로운 창을 만들어 던지기 연습을 했고 곰도 잡았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는 80평생을 백무동에서 살아온, 지리산의 살아 있는 역사책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뒤로하고 겨울의 지리산을 떠난다. 눈 덮인 겨울 지리산, 그 속에는 한평생 모진 고생 속에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한 맺힌 사연들이 가득히 묻혀 있다.
/ 글 이옹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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