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만
80년대 일본 전성 시대 돌아보고 다시 겸손해질 때
1984년 3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 도쿄특파원 빌 에모트는 일본 담배공사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물론 법원이 발부한 정식 영장은 아니지만 "당신이 쓴 기사가 왜 오보(誤報)인지를 가르쳐줄 테니 회사로 들어오라"는 홍보 담당자의 목소리는 자못 위압적이었다. 2주일 전 에모트는 일본정부가 외국계 회사의 광고비를 전년도 매출 실적에 비례하는 정도로만 허용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일본산 담배의 시장점유율을 떠받쳐주고 있다는 기사를 본사에 보냈었다. 불려간 에모트는 한쪽에는 자신의 기사 한 문장 한 문장씩을 떼 확대해 붙여놓고, 그 반대편엔 기사 몇 배 분량의 반박문을 붙여놓은 칠판을 마주한 채 긴 시간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는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다음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일본 외무성이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정례 브리핑을 하던 어느 날, 공보관실 관리 하나가 캐나다 특파원에게 다가와 "그래, 요즘도 바보 같은 질문이나 하면서 지내나…" 하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더라는 것이다.에모트는 일본 경제의 절정기(絶頂期) ―되돌아 보면 버블 붕괴 직전의 마지막 불꽃놀이에 불과했지만―인 1990년 일본 경제의 쇠락(衰落)을 예언한 '해는 또다시 진다(The sun also sets)'라는 책으로 세계적 이름을 얻었다. 이 책 역시 출간 당시에는 일본 경제학자·경제평론가, 재계(財界)인사들로부터 '일본 경제에 대한 무지를 통째로 드러낸 책'이라고 한껏 두들겨 맞았다. 에모트가 그 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2005년), '라이벌들(rivals)' (2008년)의 후속작(後續作)에서 일본 경제의 20년 불황을 불러온 3대 요인인 '과잉 부채' '과잉 설비' '과잉 노동력'에다 '과잉 자신감, 즉 오만(傲慢)'이란 심리적 요인을 빠뜨리지 않고 덧붙이는 것은 이런 불유쾌한 경험들 때문인 듯하다.
손대는 일마다 술술 풀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여겨질 때 겸손해지기란 정말 어렵다. 개인만이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다. 80년대는 일본 안 경쟁에서 이기는 상품이 곧바로 세계 시장을 거머쥐던 시대였다. 반도체·조선·가전기구·자동차·기계설비에서부터 골프채·피아노까지 모두가 그랬다. 미국에선 MIT 교수들이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라는 제목으로 일본 앞에 무릎을 꿇은 미국 제조업의 반성문을 쓰고, 유럽에선 '21세기의 승자(勝者), 일본이냐 독일이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던 시절이었다. 들리는 것을 다 듣지 못한 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이는 것을 다 보지 못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바로 오만이다. 80년대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은 일본을 자주 방문하면서 "역사상 사회주의 경제로 유일하게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기 때문"이라고 잦은 방문 이유를 댔다. 그런데 일본인들 귀에는 바웬사의 말 중에서 '사회주의 경제로'란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유일하게 성공한 나라'라는 부분만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게 오만이다.
일본 전체가 황홀경(恍惚境)을 헤매던 이 시절에도 광야(曠野)에서 홀로 외치던 선지자(先知者)의 소리는 있었다. 니시자와(西澤潤一)는 수백 개의 반도체 특허를 갖고 있어 '미스터 반도체'로 불리던 학자다. 너무나 시대를 앞질러 가 그의 특허는 대부분 미국에서 먼저 제품화됐다.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선대 회장이 여러 차례 반도체에 관한 자문을 그에게 구했다는 게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반도체란 첨단 제품이긴 하지만 수백·수천 가지 기술이 요구되는 첨단기술의 집약체는 아니다. 몇몇 또는 몇십 가지 기본 기술만 확보하면 그 다음은 거대 자본을 적기(適期)에 동원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반도체 산업 주도국의 자리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왔고 앞으론 한국을 거쳐 또다시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그때 일본에서 니시자와는 너무 많이 알아 너무 많이 보이는 탓에, 미래를 어둡게만 보는 선지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 우리도 니시자와의 말 가운데 '한국을 거쳐'라는 대목만 귀에 박히고, '또다시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라는 대목은 그냥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연아 선수가 얼음판 위에서 점프에 이은 회전까지 잇따라 성공시킨 뒤 우리는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차오르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감은 좋다. 그러나 오만은 안 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돈 안 들이고 해주는 입에 발린 칭찬이 겸손하기로 소문난 일본인마저 오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만 다음엔 끝없는 추락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