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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 환자는 평생 '밋밋한 당뇨식'을 먹으며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 산해진미가 눈 앞에 있어도 그림의 떡 보듯하며 식사 요법을 지켜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뇨식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식이요법을 지시한 당뇨병 환자 중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환자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뇨식을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한다"고 전했다.
◆"목숨 갉아먹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당뇨병 환자인 최모(41)씨는 출근 전 아침 한 끼만 당뇨식을 먹는다. 그는 "나도 식이요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평소 접대 자리가 많아 도저히 당뇨식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거래처 접대 상대방이 술이 오르면 '한잔은 괜찮다'며 술을 강권하는데 목숨을 갉아먹는 줄 알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의도에서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무형(36)씨는 "점심 때 사무실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저칼로리, 저염식을 해야 하는 당뇨병 환자가 먹을 만한 음식을 파는 식당이 없다. 당뇨식 도시락을 싸 다니면서 처량하게 혼자 밥 먹는 것도 하루이틀"이라고 말했다. 이런 애환은 직장인만의 일이 아니다. 주부 이경숙(64)씨도 "매일 내 당뇨식과 가족 식사를 따로 준비하기는 너무 벅차고, 가족에게 맛없는 당뇨식을 매일 먹으라고 강요하기 미안해 그냥 내가 일반 식사를 먹게 된다"고 말했다.
- ▲ 최병형씨(가운데)처럼 혈당 수치가 높은 환자들은 회식 자리에서도 술과 기름진 안주를 삼가고 채소 등을 위주로 한 식이요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당뇨병 환자들이 식이요법을 철저히 지키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spphoto@chosun.com
- ▲ 최병형씨(가운데)처럼 혈당 수치가 높은 환자들은 회식 자리에서도 술과 기름진 안주를 삼가고 채소 등을 위주로 한 식이요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당뇨병 환자들이 식이요법을 철저히 지키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sp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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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니, 당뇨병 환자의 '의지 박약'만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뇨병 환자들은 독하게 '고행길'을 선택해야 한다. 다음 2가지 실험이 이유를 말해준다.
◆당뇨병 환자, 일반인과 회식 같이 해보니
당뇨병 환자가 일반인과 똑같이 회식을 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난 8일 강북삼성병원 직원 5명(당뇨병 1명, 당뇨병 직전 단계인 내당능장애 1명, 정상인 3명)을 삼겹살 집에 모이게 해 회식을 시킨 뒤 실시간으로 혈당 변화를 알아봤다.
당뇨병인 권영구(44)씨는 삼겹살은 먹지 않고 소주만 2병 마셨다. '2차 자리'로 옮겨서는 맥주 1000㏄와 소시지, 튀긴 감자 등의 안주를 먹었다. 술자리가 파한 오후 11시 해물 라면, 튀김, 어묵 등을 사먹었다. 회식 전 120㎎/dL이던 다음날 새벽 권씨의 혈당은 최고 276㎎/dL에 달했다. 권씨는 실험 이전에도 업무상 매주 2~3회 이런 회식을 했다.
박철영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이 정도 혈당 수준이면 핏속의 당분이 혈관 벽을 심하게 손상시키기 시작한다. 특히 권씨처럼 무리한 회식으로 혈당의 변동폭이 커지면 당뇨병 합병증이 더 잘생기고 사망률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 내당능장애인 최병형(47)씨는 권씨가 먹은 회식 분량에 삼겹살까지 곁들였다. 최씨의 혈당은 회식 후 2시간이 지나도 140㎎/dL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고혈당 상태가 새벽까지 지속됐다. 그러다 다음날 오전 8시 정상치인 96㎎/dL로 떨어졌다. 박 교수는 "술을 마시면 체내 포도당 합성이 방해돼 일시적으로 혈당이 떨어진다. 이 때 혈당 체크를 하고는 '술 마셨는데 혈당이 괜찮네'하고 방심하는 내당능장애 환자가 흔하다. 이런 습관을 바로잡지 않으면 반드시 당뇨병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혈당 조절이 안 되는 당뇨병 환자의 3분의 2는 술자리 때문이다. 술을 한 번 마시면 혈당 이상의 여파는 3일 이상 간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당뇨병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뇨식, 약보다 더 좋은 '치료제'
한편, 안철우 교수팀은 올 6~10월 당뇨병 환자가 당뇨식을 따를 때 식후 혈당 조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연구팀은 강남세브란스병원의 당뇨병 환자 중 482명을 대상으로 한 끼는 자신이 먹고 싶어하는 일반식을 먹게 하고, 한 끼는 병원 구내식당에서 판매하는 당뇨식을 먹게 했다. 각각 식사 2시간 후 혈당을 잰 뒤 평균을 비교했다. 그 결과, 일반식 섭취 후 식후 혈당은 228.09㎎/dL였지만 당뇨식 섭취 후는 209.27㎎/dL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안 교수는 "단 한 끼의 당뇨식만으로도 혈당이 크게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뇨식을 규칙적으로 하면 뚜렷한 혈당 저하 효과가 반드시 나타난다"며 "식사를 하면 1~2시간 후에 혈당이 가장 많이 올라가는데, 이 시기에 올라간 혈당이 여러 염증 물질을 만들어내 각종 심혈관 질환들을 일으키므로, 당뇨병 환자는 어떤 유혹과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당뇨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금숙 헬스조선 기자 lk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