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무측천 봉건의 한계 뚫고 스스로 天子가 된 혁명적 여성 정치가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
시대를 지배했던 남자들의 눈에 그녀는 악행과 허영을 일삼은 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냉철한 눈은 그녀가 정사를 주관한 기간 중국이 어느 때보다 빛나는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진보를 누렸다고 평가한다. 한낱 후궁에 불과했던 여인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이해관계를 넘나드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권력을 쟁취하기까지. |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 240여 명의 황제 중에 유일무이한 여성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녀가 집권하던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봉건사회가 가장 발달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아내인 황후로서, 다음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로서, 그리고 마지막 10여 년 동안은 황제로서 중국을 거의 반세기 가까이 통치했다. 군대를 동원했다거나 수구세력과 원로들을 억압했다거나 반대세력을 뿌리 뽑는다거나 하는 유혈혁명으로 권좌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왕가의 신분도 아니었다. 무측천은 천한 궁녀의 지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를 쟁취한 것이다. 당나라 시대를 연구하는 중국 당사(唐史)학회는 1985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무측천 학술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 열기가 사뭇 대단해 첫 토론회는 3년 내내 열렸다고 한다. 성인과 위인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중국 역사를 통틀어 사후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역사적 영예를 누리는 인물은 흔치 않다. 요녀와 악녀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오랜 기간 인색했다. ‘무측천 평전’을 번역한 역자들에 따르면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라 할 수 있는 신당서(新唐書)는 ‘무측천이 악행을 일삼고도 도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요행(운)이다. 음란한 짓거리를 내놓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써놓았다. 심지어 근대 중국의 저명한 문학가 린위탕(林語堂)조차 ‘중국역사상 가장 교만하고 음탕하고 허영기가 있고 고집스럽고 명성이 나쁜 황후이며 잔인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 무측천을 향한 비난은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식을 죽일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며 남첩을 둘 정도로 색을 밝힌 사람이었다는 것에 집중된다. 이와는 반대로 남북조 이래 파괴되었던 중국의 사회와 경제를 회복시키고 민족화합을 공고히 했던 통치력과 생산성을 높인 탁월한 업적에 대해 초점을 맞춘 연구가 부각된 것은 최근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신하들의 직언을 과감히 받아들인 도량이 넓은 군주였으며,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사람을 귀히 여겨 인재발굴을 위해서라면 반대파라도 적극 등용했던 현군(賢君)이었다. ‘군주의 도리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란 철학을 갖고 농업발전에도 힘써, 그의 통치기간 중 중국 인구는 652년 380만호였던 백성이 705년 615만호로 늘어나는 등 풍요로움을 구가했다고 기록돼 있다. 무측천의 삶은 그 자체로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사용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본질이란 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절은 변하고 사람도 변했으나, 권력이라는 목표에 돌진하기위해 치러야 할 대가와 남(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변함이 없다. 무측천이 무려 1300여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진정한 여제(女帝)로 추앙받는 것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와 얄팍한 술수로 황제나 주변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중상모략과 이간질로 적을 물리치는 대신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업을 이룬 정치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악운을 행운으로 무측천이 태어난 624년은 통일 당나라가 세워진 해다. 그해에 하남 하북 강회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새로운 통치자 앞에 놓인 과제는 어떻게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건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고조 이연은 각종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국가기관을 완비했으며 인재등용에 힘쓰고 지방통제를 강화했다. 이연에게는 아들이 네 명 있었는데 장남은 일찍 죽어 그가 황제에 오를 때는 세 아들만이 남았다. 결국 둘째 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는 참혹한 권력투쟁의 끝에 626년 8월 제위에 오른다. 이때 그는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바꾸는데 중국역사에서 유명한 당 태종의 ‘정관의 치(治)’가 시작되는 때다. 무측천은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처음 궁과 인연을 맺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본래부터 비천한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상으로 크게 돈을 벌어 나중에 고위관직까지 오른 장안의 신흥 권세가였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재상 친척의 딸로 학식과 교양을 갖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모친의 영향으로 무측천도 불교를 믿었고 어려서부터 경전을 읽었다. 아버지 무사확이 마흔여섯, 어머니 양씨가 마흔네 살에 나은 둘째딸이 바로 무측천이었다. 무측천은 아버지가 일곱 개 주의 도독으로 옮겨 다닌 덕분에 어릴 적부터 중국 땅의 절반 정도를 다 경험할 수 있었다. 규방에 머물면서 가사를 배우는 대신 비교적 개방된 환경에서 책을 읽고 그림과 음악과 춤을 배웠으니 성장 환경부터 비범했던 셈이다. 무측천은 교양과 학식도 뛰어났지만 인생을 바꾼 것은 탁월한 미모였다.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태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입궁시키고 재인(才人·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는다. 딸을 배웅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무측천은 “사람들은 천자를 뵙는 일을 복(福)으로 알고 있는데 왜 슬퍼하시느냐”며 달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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