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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⑮]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화이트보스 2010. 3. 20. 17:12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스크린 밖에서는 한 번도 행복한 적 없었다”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금발머리에 육감적인 입술과 반쯤 감긴 눈, 미국 여배우 마릴린 먼로는 단연 당대 최고의 섹스 심벌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통풍구에서 스커트를 휘날리던 이 섹시한 여배우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린 끝에 서른여섯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화려한 인기와 비극적인 종말은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에 ‘스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엘 부어스틴은 책 ‘이미지와 환상’에서 “옛날에는 명성이 높은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현대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옛날의 유명인사들에게는 ‘업적’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는 유명인사가 허구적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명성과 위대함을 구분할 능력조차 잃어버려 ‘유명한 사람이 곧 큰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유명인 숭배와 영웅 숭배를 혼동하는 것이다. 과거 영웅들은 ‘신념’에 따른 자기만족이 우선이었지만 ‘스타’라고 불리는 현대의 유명인사들은 타인들이 지배하는 시장(市場) 만족이 우선이다. 자기만족과 타인 만족 즉,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괴리 속에서 가장 큰 심적 고통을 겪는 이는 당사자다.

요즘 스타의 자살 같은 비극적 종말 뒤편엔 생전에 그가 겪었던 심적 고통이 드러나는 때가 많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최근 타계한 마이클 잭슨의 경우를 보더라도 ‘팝의 역사를 새로 쓴 황제’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고독한 사생활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음을 알 수 있다. 약물로 손상된 그의 몸을 찍은 사진들을 보노라면 강한 연민이 솟구친다.

문득 배우 마릴린 먼로가 생각난다. 그녀야말로 화려한 삶 뒤편에서 누구보다 외로워하며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괴리를 체험한 당대 최고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영화평론가 유지나씨는 책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서문에서 “우리는 먼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편견에 가득 차 있다”고 잘라 말한다. 유씨의 말대로 먼로는 당대 유명한 연기코치들로부터 연기술을 배우고 타고난 감성과 지적 열정으로 자기 혁신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면서 “배우(俳優)는 기계가 아니라 창조하는 예술가”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하여 유씨는 먼로를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부조화 속에서 결국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과 직면한 사람, 연기를 통해 자기혁신을 꾀한 자아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인 시인 같은 지성파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히 자기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길 거부한 지성”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실제로 먼로는 자서전 ‘마이 스토리’에서 실체와 환상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끊임없이 겪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섹스 심벌, 백치미라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인조 영웅’을 만들어내는 대중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그녀의 토로는 철학자를 능가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본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멋대로 지어낸다. 그러고는 자기들의 환상이 깨지면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자기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스크린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나눌 한 남자를 찾지 못해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세 번의 이혼에 따른 정신적 상처와 (유전적) 우울증으로 약물에 의지하며 살았다. “스크린 밖에서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할리우드의 주류적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여배우의 영혼에 5센트의 가치조차 인정해주지 않는 할리우드에서도 이방인이었다”고도 말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마릴린 먼로는 사생아나 마찬가지였다. 할리우드의 한 스튜디오에서 필름 편집자로 일했던 생모는 먼로를 뱃속에 가진 상태에서 이혼했다. 먼로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만 했다. 1926년 6월1일생인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Norma Jean). 세월이 흘러 스타가 된 후 자신의 생부가 생모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천신만고 끝에 연락을 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싸늘한 대답을 듣는다.

그나마 생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경제적 궁핍을 이유로 딸이 태어나자마자 12일 만에 다른 집에 입양을 보낸 생모는 가끔 딸을 보러 가긴 했지만 정이라곤 없었다. 엄마가 너무 무서워 엄마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옷장 속에 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평생 사랑에 목숨 걸며 ‘애정 결핍’에 시달렸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생모는 노마 진이 일곱 살 되던 해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녀를 데려온다. 하지만 단란한 생활을 꿈꾸던 노마 진의 꿈은 이내 부서진다. 생모가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해버린 것이다. 어린 노마 진은 다시 고아원과 입양생활을 반복한다. 먼로는 고아원에서 지내던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세상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었던 어린 소녀의 도피처는 다름 아닌 ‘공상’이었다. 너무 외로워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마다 그녀는 온갖 달콤한 상상 속으로 도망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세상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성적 판타지도 있었다. 나체로 교회에 가 ‘신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몸이 아름답게 변하자 공상은 현실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남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 태어나 처음으로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섹시한 외모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아 현실세계로 접속하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였지만 욕망과 이기심 덩어리인 인간들과의 거리 조절을 어렵게 만드는 독(毒)이기도 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라이프’지에 그녀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입양되어 살 때 가족들은 나를 극장으로 쫓아 보냈다. 늘 혼자였던 꼬마는 영화에 푹 빠졌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던 나는 열한 살이 되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발견했다. 8㎞가 넘는 등·하교 길을 왕복하는 동안 차에 탄 남자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지나가는 일꾼들이 손을 흔들었다. 세상이 갑자기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때로 가족들은 내가 너무 크게 웃고 명랑하게 군다며 걱정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를 요구해 나를 두렵게 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나는 평범한 주부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환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먼로는 사진 찍히기를 좋아했다. 무명시절 50달러가 필요해 찍은 누드사진으로 훗날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몸이 헤픈’그녀에게 양부모가 권한 것은 결혼이었다. 노마 진은 겨우 열여섯 나이에 스물한 살의 남자 도허티와 결혼한다. 본래 해병 입대를 원했던 첫 남편은 어린 신부의 외모에 반해 ‘입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하지만 2년 뒤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남편의 배반으로 깨졌다. 당장 끼니를 때울 일이 막막해 군수공장에 들어가 페인트 칠, 낙하산 수리 같은 막일을 시작한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걸까. 마침 한 사진작가가 젊은 여성노동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공장을 방문했다. 3일간 공장 이곳저곳을 찍던 사진작가는 유독 노마 진이라는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지 않은 포즈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의 소개로 노마 진은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간다.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녀 나이 열아홉이었다.

운명처럼 열린 배우의 길

카메라 감각이 뛰어났던 노마 진은 1년 후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 폭스사로 발탁되면서 모델에서 배우로 거듭난다.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은 폭스가 붙여준 ‘마릴린’에 생모의 이름인 먼로를 더한 것이었다. 그러나 데뷔 시절은 처참했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3년이란 세월을 무명으로 보내야 했다. “도저히 배우로서 자질이 없다”는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다. 결국 1년 만에 해고된다.

그녀 인생에서 위기의 순간에는 늘 남자가 있었다. 해고 직후 다시는 할리우드에 발붙이지 못할 것 같던 그녀 앞에 배우를 발굴해 영화사에 소개해주는 일을 하던 솅크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솅크는 콜럼비아와의 계약을 주선한다. 당시 먼로 주변에는 그녀가 성공의 발판이 되어주는 남자들에게 “성상납을 한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남자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섹스를 한다는 것이었다.

콜럼비아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코러스의 아가씨들’이란 영화에서 비중 있는 단역을 맡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1년 계약이 끝나면서 먼로는 다시 실직자가 된다.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자동차 수리비 50달러가 필요해 사진작가 톰 켈리와 함께 누드 달력 사진을 찍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영화계 관계자들을 만나 배역을 찾던 먼로는 마침내 할리우드의 실력자 조니 하이드와 인연을 맺는다. 조니는 그녀의 몸에만 관심이 있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먼로의 비참한 출생과 내면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먼로는 하이드의 소개로 유명한 존 휴스턴 감독의 ‘아스팔트 정글’에 출연하게 된다. 대사 몇 줄에 출연 장면도 두 군데밖에 없었지만 비중 있는 역이었다. 먼로는 처음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무한한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먼로는 요부의 관능미와 소녀의 천진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전쟁의 피로와 재건사업에 지친 남자들은 먼로의 ‘헤프고 착한 여자’이미지에 열광했다.

행운은 이어졌다. 곧바로 유명 감독 조지프 맨키위츠의 ‘이브의 모든 것’에 캐스팅된 것이다. 큰 배역은 아니었지만 존재감을 보여주기에 손색없는 작품이었다. 바야흐로 이제 그녀가 할리우드 스타덤에 오르는 순간이 오는가 했는데 후견인 하이드가 심장병으로 죽고 만다. 장례식 날 먼로는 절규하듯 통곡했다. 먼로는 당시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흔들렸다.

하지만 먼로는 하이드의 장례식을 마치고 영화 ‘당신도 젊다’를 찍으면서 감독이자 유명극작가인 엘리아 카잔과 인연을 맺게 되고 카잔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1951년 1월1일 ‘라이프’지 표지모델이 됨으로써 드디어 인기정상의 궤도에 올라섰다.

관능미와 소녀의 천진함을 모두 가진 여자

그 후 2년 동안 그녀의 인기는 꾸준히 올라갔지만 ‘멍청한 금발미인’이라는 혹평은 늘 따라다녔다. 언론은 그녀를 향해 ‘모든 남자를 받아들일 것 같은 멍청한 미소를 지닌 할리우드의 표준적인 금발미인’이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그녀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화제들, 이를테면 그림 음악 책 역사 지리 스포츠 정치 등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괴감에 빠졌다.

그럼에도 먼로의 대단한 점은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대학 공개강좌를 듣기도 하고 본격적인 연기공부를 위해 뛰어난 연기지도자로 꼽히는 미하엘 체호프를 소개받는다.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후손이기도 한 미하엘 체호프는 “배우란 캐릭터의 단순한 모방자가 아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먼로가 추구하는 지적, 예술적 관심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교습법은 먼로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먼로는 제자를 자처하며 그를 따랐다.

인기가 올라갈수록 스캔들이 따라다녔다. ‘클래시 바이 나이트’ ‘우리는 독신자’에 출연하며 유명해지자 또다시 추문들이 터져 나왔다. 달력용 누드 사진을 찍은 사실이 폭로되었고 거의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이야기, 정신병원에서 죽은 어머니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여군 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에서 목선이 지나치게 파인 옷을 입어 군인을 모독했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스캔들에 대한 대처법은 철저하게 그녀다웠다. 성적 매력을 철저히 이용하면서도 자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순진한 아이 같은 표정은 위기마다 빛을 발했다. “생활고 때문에 옷 벗고 사진 찍은 게 그렇게 잘못이었나요?”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슬픈 표정을 지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용서해주었다. 추문이 터져 나올 때마다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 먼로에게 여론은 점점 관대해졌다. 연기력을 호평하는 평론가들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 탄생에는 당시 미국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남성적 세계와 질서를 거스르는 여성들을 ‘요부(妖婦)’라는 코드로 분석한 영국의 논픽션 작가 제인 발링허스트는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이마고)에서 “1950년대의 먼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포연이 가라앉고 나서 일상생활이 안정으로 돌아가자 남자 마음을 흔들되 너무 많은 보상을 요구하거나 남자들을 파멸로 몰아가지 않는 사랑스러운 미녀를 갈구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발링허스트에 따르면 먼로에게는 결정적인 비장의 카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익히 알려진 관능미에다 어린 소녀의 천진무구함과 연약함을 결합시킨 이미지다. 전쟁의 피로와 전후 재건사업으로 지친 남자들은 유혹해도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착하고 헤퍼 보이는’ 마릴린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 먼로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남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은 먼로가 ‘남자보다 우월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것 말고는 다른 꿍꿍이가 없는 여자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끌어가든 관심도 없고 간섭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전부는 오로지 남자들의 애정을 받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생활에 찌든 남자들에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고 환각의 재현을 보장하는 심리적 비아그라와도 같은 것이었다는 게 발링허스트의 분석이다.

 

최근 연합뉴스에 공개된 한국 위문공연 당시의 먼로. 멀리 대구 팔공산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뭘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백치미’는 그녀의 중요한 매력이었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보여준 ‘학교 교육의 부족’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가사가 없는 걸로 봐서 클래식 음악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는 수준이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 나온 그녀의 대사는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리한 것이 중요할 때는 나도 영리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남자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더군요.”

디마지오와의 짧고도 강렬한 사랑

먼로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 중 하나가 결혼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당대 최고 인텔리이자 극작가이던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두 번 다 불행한 이혼으로 끝났지만 드라마틱한 두 번의 결혼은 당대 매스컴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1941년 ‘56경기 연속안타’로 미국 메이저리그 120년 역사의 ‘3대 기록’ 중 하나를 낸 조 디마지오(1914~1999)는 양키스에 10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 선수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는 등 남다른 애국심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경기장 밖에서는 단정한 정장 차림에 뒤로 빗어 넘긴 머리를 한, 조용한 성품을 지닌 신사였다.

먼로가 디마지오와 결혼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강’ 촬영이 끝난 1954년 초다. 이들 커플의 사진과 기사는 전세계 잡지 표지와 신문의 헤드라인, 가십란을 장식했다. 조 디마지오는 서른아홉이었고 먼로는 열두 살 연하였다. 디마지오는 이미 은퇴한 후였고 먼로는 인기가 절정에 달한 시점이었다. 섹스 심벌로 우뚝 서게 한 ‘나이애가라’(1953)가 대성공을 거두고 1953년 봄 ‘가장 인기 있는 배우에게 주는 상’ ‘1952년에 가장 급부상한 배우에게 주는 상’을 연이어 수상한 뒤였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으로 먼로는 한국과도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차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달려갔다. 영하의 기온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먼로의 모습은 전세계 잡지와 신문을 도배했다. (지난 7월30일 연합뉴스에는 먼로가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 속 먼로는 대구 K-2 비행장에서 팔공산을 배경으로 갈색 바지와 검은색 항공점퍼를 입고 ‘F-84G’ 전투기 왼쪽 날개 위에 서서 왼팔을 하늘 높이 쫙 편 채 활짝 웃고 있다. 소장자는 미국 한인 교포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와의 관계는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남자들의 눈요깃감이 되는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남편은 몇 없을 것이다. 먼로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조 디마지오는 불안했다. 그녀가 자신의 대표작 ‘ 7년 만의 외출’을 찍을 때였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 유명한 장면은 1954년 9월10일 새벽 2시 반 뉴욕에서 촬영되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무려 열다섯 번이나 치마가 올라가는 걸 직접 보기 위해 1000~4000명의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이틀 먼저 뉴욕에 도착한 디마지오는 바람이 나오는 기계 위에 서 있던 먼로의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릴 때마다 사람들이 “더 높이, 더 높이! ”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분노를 참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 호텔이 떠나갈 정도로 난투극을 벌였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이혼을 발표했다.

디마지오와 먼로의 법적 결혼일수는 287일에 불과했다. 비록 결혼기간은 짧았지만, 디마지오의 사랑은 길었다. 먼로는 이혼 후 작가 아서 밀러와 재혼, 이혼을 반복하고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렸지만 디마지오는 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먼로의 장례식도 직접 주관했다. 먼로가 죽은 후에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무덤에 장미꽃을 보냈다. 디마지오는 1999년 3월8일 미 플로리다 주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언은 “이제 마릴린 곁으로 갈 수 있겠군”이었다고 한다.

디마지오와의 이혼은 먼로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먼로가 정신적으로 의지한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 박사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먼로는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제와 진정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궁내막증까지 앓고 있었다.

할리우드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먼로는 뉴욕으로 향한다.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 배우의 연기력을 날카롭게 평하기로 유명했던 스트래스버그를 찾아갔다. 스트래스버그는 먼로가 할리우드의 정체된 작업풍토에 길들어 감각이 많이 무뎌졌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먼로는 연기를 알아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매사 초심자의 마음으로 임했다. 그리고 그녀는 2년여 공백을 비웃듯 1955년 12월,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20세기 폭스사와 7년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돌아간다.

관능적인 겉모습, 초라한 자아

먼로의 세 번째 남편 아서 밀러는 우리에게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당대 최고의 극작가다. 여러 공식 모임에서 먼로와 교분을 쌓아오던 그는 먼로의 지친 영혼을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로 그들을 사로잡으세요. 그러나 이 게임에서 당신이 상처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심지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먼로는 밀러의 자상함에 강하게 끌렸다. 그는 먼로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지적 수준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고 섹스 심벌의 이미지가 그녀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을지도 잘 아는 듯했다. 먼로는 내향적이고 과묵한 밀러를 깊이 사랑했다. 그는 연극계에서 존경받는 극작가였지만 동시에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잘난 체하지 않고 솔직담백했다. 밀러 역시 정직하고 천진난만한 먼로를 사랑했다.

밀러는 먼로를 만나기 전부터 첫 부인과 파경 직전이었으며 먼로와 가까워지기 전 이미 이혼 상태였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사랑을 불태운 시기는 먼로가 디마지오와 이혼하고 1년여 뒤인 1955년 12월이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7월 결혼한다.

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이 넘쳤다. 새 인생을 꾸려나갈 것처럼 활기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잠시였다. 먼로가 밀러에게 집착할수록 둘의 관계는 순탄치 못했다. 밀러는 먼로의 연이은 불면증과 수면제 과용, 무기력증에 점점 지쳐갔다.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임신한 지 석 달 만에 유산한 1958년 11월 초부터였다. 먼로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잃자 극도로 절망했고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무너진 자신에 대한 자학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저녁마다 진정제를 지나치게 복용하는 바람에 아침이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에는 이성을 잃고 밀러에게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날이 잦아졌다.

급기야 1959년 8월 발작을 일으킨 먼로는 촬영장에 나오지 못했고 한 달 동안 촬영도 중단된다. 1960년 후반부터 61년 1월까지 먼로는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감정 기복도 심했고 “자살은 인간의 특권”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댔다. “아무래도 우울증으로 죽은 어머니에게 허약한 마음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으며 세상과 담을 쌓았다.

몸의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담낭제거술로 오른쪽 배에 흉터가 생기자 충격을 받았고 가슴도 빈약해지고 엉덩이와 얼굴 살이 처지며 손에 갈색 반점이 생기고 있다며 괴로워했다. 이 와중에 의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선고했다. 불면증은 더 깊어져서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밀러는 먼로의 그런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약물과다복용으로 위세척을 하고 누워 있는 일이 잦았던 먼로는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향해 “잔인한 것들이야. 개자식들. 오, 맙소사! ” 같은 비난과 탄식이 섞인 혼잣말을 해댔다. 당시 먼로가 지은 시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완강하게 매달려 있는 자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삶.

나는 두 갈래로 나뉜 곳에 서 있다.

강추위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거미집만큼

강하다.

불안하게 매달려 있지만

어쨌든 견뎌내는 거미줄.

언젠가 그림에서 본 색깔을 띤

구슬 같은 빛-아아 삶이여

그들은 너를 속여왔다.

당시 그녀가 그린 그림도 사후 공개되었는데 하나는 교활하면서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초라한 옷에 발목께로 흘러내린 양말을 신은 조그만 흑인소녀를 그린 그림이다. 전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아이고 후자는 그녀의 어두운 자아다.

먼로는 1962년 8월5일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집 거실에서 벌거벗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부검을 했던 의사는 약물과다복용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날 상품으로만 여긴다”

책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에는 리처드 메리먼 기자가 ‘라이프’지에 실은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가 실려 있다. 기사에는 구구절절 그녀가 겪었던 삶의 피로가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우선 먼로는 스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로했다.

“유명해지는 순간, 성숙하지 못한 인간본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인기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유발한다. 그들은 내가 유명하니까 나한테 다가와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사람들의 무의식과 마주친다. 몇몇 배우 혹은 감독들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기자에게 한다. 나와 키스하는 것이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다는 어떤 배우의 말을 적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바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시기하는 것 같다. …나는 진실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사람들의 환상 속에 머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여긴다. …때때로 사람들은 저녁모임에서 내가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하며 나를 초대한다. 나는 순수한 목적으로 초대받지 못한다. 단지 장식품이다.”

그녀가 은둔생활을 할 즈음 이뤄진 이 인터뷰에서 먼로는 인기의 허망함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남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이거나 섹시하게 보이는 게 스트레스는 아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스트레스다. …인기라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하고는 다르다. 인기로 허기를 채울 수는 없다. 조금 따뜻하게는 해주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지금껏 받은 인기는 언젠가 시들해질 것이다. 인기는 변덕스럽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그래서 그것에 연연하며 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혹자는 먼로를 남성중심주의 사회가 낳은 희생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로는 자신의 성공과 야망을 위해 자신의 몸과 성적 코드가 먹혀들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철저히 이용해 마침내 모든 것을 가졌다. 하지만 성취가 주는 것에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다. 세상과의 접속이 쉬울수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도 쉽다는 것,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스타’를 꿈꾸는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숙명임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참고도서’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이미지와 환상’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

‘마이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