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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⑫]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화이트보스 2010. 3. 20. 16:56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버락 오바마보다 더 강하고 매력적인 여성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솔직한 성격,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오바마의 고통스러운 반쪽’ ‘불만에 찬 흑인여성’이라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그러나 신념에 찬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가질 뿐 아니라, 남편 버락 오바마마저 더 진실돼 보이게 만들었다. 버락 오바마의 부인이 아닌, 성공한 흑인여성으로 들여다볼 때 그녀의 삶은 훨씬 가치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보다 영부인 미셸의 인기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똑같은 ‘가식 없는 모습’이 그녀의 매력으로 꼽힌다.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는 물론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뉴스위크’는 자신의 능력과 인종, 계급,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갈등을 극복하며 얻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의 복잡함과 혼란을 오로지 실력과 진지함으로 이겨낸 미셸 오바마는 미국 현대여성의 또 다른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미셸 라본 로빈슨은 1964년 1월17일 시카고 남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청 정수공장 보일러 룸에서 교대로 근무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미셸 위로 16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가 있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했다. 서른 살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이후 건강이 계속 나빠졌다.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해 자녀 둘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둘 다 프린스턴대에 보냈으니 자식농사를 잘 지은 셈이다. 어머니는 딸 미셸이 웬만큼 자라자 은행에 취직해 최근까지 다니다 손녀를 돌보기 위해 그만뒀다.

미셸이 태어난 곳은 흑인이 주로 거주하는 서민동네였다. 가족 넷이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힘겨운 삶이었다. 부모가 단 하나뿐인 침실을 쓰고 거실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아들 방, 딸 방,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교육열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부모는 남매에게 매일 밤 텔레비전을 1시간만 보게 하는 대신 독서, 체스, 스포츠 등 몸과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활동을 권했다.

미셸의 어머니는 딸이 집중력이 매우 강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치더라도 그만 치라고 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성격이 약간 불같은 데가 있고 지는 걸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운동선수로서도 재능이 있었는데 오빠인 크레이그에 따르면 지는 것을 싫어해 경쟁적인 스포츠는 아예 하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현재 오리건 주립대학 농구팀 감독이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곧 영재반에 들어갔으며 중학교 졸업식 때는 졸업생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생의 95% 이상이 아이비리그에 들어가는 명문 공립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열심히 일하는 부모의 뒷받침을 받으며 미셸은 2학년을 월반했다. 그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오빠의 뒤를 이어 프린스턴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택한다.

가난하지만 훌륭한 부모

미셸의 1차적 스승은 부모였다. 양친은 그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지속적으로 불어넣어준 멘토였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늘‘무엇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무엇이 잘못될지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주문처럼 늘 내 머리에 새겨져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었다.”

미셸은 대통령선거 기간 중인 2008년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연설에서 “내 인생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시청 공무원의 박봉으로 4인 가족을 부양했다는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삶을 보여주었다. 한때 수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서른이 넘어서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없는 지경에도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매일 직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미셸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신장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아버지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마음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미셸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커리어를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마다 과연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딸 말리아, 샤샤와 함께한 오바마 부부.

남에게 베풀며 사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부모였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며 일을 하면서도 정치 자원봉사를 했고 어머니도 틈만 나면 학교 자원봉사를 했다. 이런 성장 배경은 그녀가 나중에 시카고의 일류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사회봉사직으로 옮겨 사적인 삶보다 공적인 삶에 관심이 많던 버락 오바마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바탕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는 1980년대 후반, 결혼 전 미셸 집을 방문했을 때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것처럼 완벽한 가정이었다”고 말했다. 일과 양육에 헌신하는 쾌활한 아버지, 과자를 굽고 아이들 학교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어머니, 친구 같은 오빠. 친척들도 와서 몇 시간씩 농담을 하고 식사하며 음악을 듣는 모습은 단란한 가족의 전형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낯선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버락으로서는 충분히 충격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가정에도 그늘이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곧 어머니에게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저것 꼼꼼하게 조정하는 데 들인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미셸은 선거기간 중 여러 인터뷰를 통해 굉장한 현실감각을 드러내보였는데, 아마도 평온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을 어릴 적 부모를 통해 봐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프린스턴의 이방인

미셸은 1981년 가을 프린스턴대에 입학하면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알았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프린스턴은 겨우 몇십년 전에야 남녀공학이 됐고, 흑인을 입학시킨 것은 채 20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그녀는 우리로 치면 81학번인데 당시 총 1141명의 프린스턴 신입생 가운데 94명이었던 흑인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사실 미셸이 태어난 시카고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도시다. 외할아버지는 목수였는데 피부색 때문에 목수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건축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셸이 성장하던 시절에는 세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인권운동으로 1964년에는 민권법이, 1965년에는 투표권법이 제정됐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맬컴 엑스 같은 걸출한 흑인지도자가 등장했다. 미셸이 살던 도시 태생인 제시 잭슨 목사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최초의 흑인이 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미셸 부모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노력하고 꿈은 원대하게 품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미셸은 프린스턴대 학보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몇 안 되는 흑인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생각했던 것만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부유하고 근심 걱정 없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BMW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BMW를 타는 학부모조차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텔레그래프’ 인터뷰)

일부 백인 교수와 친구들이 아무리 진보적이고 편견 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해도 때때로 방문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문화적 충격은 자칫 부자에 대한 질시와 미움, 혹은 그들의 삶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으로 작용하기 쉬운데 미셸은 ‘봉사활동’을 택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수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역 아동들을 돕는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센터 일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공부방 자원봉사나 야학 같은 일이다. 또 ‘프린스턴’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다종다양한 지역 흑인 학생들을 위한 지도와 상담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흑인연합조직에서도 활동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미셸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계획을 세우고 지켰으며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 전부터 공부했다. 그녀의 존재감은 대단했다고 한다. 하버드 로스쿨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윌킨스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논리적 기교를 부리기도 하는데 미셸은 언제나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했다”고 회고한다.

흑인 엘리트의 진로

‘공부’라는 현실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놓지 않았던 미셸의 선택은 대학졸업논문에 그대로 반영된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녀는 1985년 졸업논문 제목으로 ‘프린스턴에서 교육받은 흑인과 흑인사회’를 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학에서 나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게 집필 동기였다. (버락 오바마 선거운동본부는 처음엔 대통령선거 때까지 미셸의 이 논문 공개금지를 요청했지만 투명성을 지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의식하면서 2008년 2월에 공개했다.)

미셸은 논문작성을 위해 흑인 졸업생 4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들 중 다수가 흑인에게 경제적 교육적 직업적 기회를 제공한 소수계 우대정책이 시행되던 1970년대에 프린스턴대를 다녔다. 그녀는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이 졸업 후 교육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향상되면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두들 대학시절 초기에는 흑인사회의 일원으로 내가 받은 혜택을 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줄 의무가 있고 현재와 미래의 능력을 이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써야 한다는 생각에 전혀 의심이 없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 하나같이 명문대학원 혹은 전문대학원 입학이나 성공적인 기업에 고액 연봉자로 취업하는 것 등 백인 학생들과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사뭇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나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오바마 부부.

미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졸업 후 혼돈은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든 그녀가 하버드 로스쿨을 선택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하버드에서도 프린스턴에서와 같은 인종적 차이를 느꼈다. 공강 시간에 법률학술지를 만드는 등 로스쿨의 전통적인 활동을 하기보다 자신이 태어난 흑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다. 유색인종 학생들의 입학을 돕는 활동을 했고 하버드에 더 많은 소수계 학생과 교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성적이 우수해 1988년 졸업할 무렵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성공적인 기업의 고액 연봉’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최고 직장으로 꼽히는 로펌 ‘시들리 앤 오스틴’에 입사한다. 마케팅과 지적재산권 업무를 담당했는데 연예·오락산업 관련법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고액 연봉을 받는 덕분에 학자금 대출도 갚을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있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미뤄놓았다. 이대로 가면 백인 주류사회로의 진입과 성공이 보장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남자를 만나는데, 바로 버락 오바마다. 버락은 미셸이 입사 1년 만에 인턴하계사원으로 맞은 후배였다. 1989년 당시 버락은 미셸의 고향인 시카고 남부지역에서 3년간 지역사회운동을 한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친 상태였다.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마음속으로 법대 입학이라는 선택을 함으로써 젊은 시절의 이상을 저버린 것은 아닌지, 돈과 권력이라는 냉엄한 현실에 굴복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던 시절이었다.

“얘기 나누기 좋은 남자”

미셸은 회사 측으로부터 인턴사원에게 근무 요령을 가르쳐주는 멘토가 되라는 지시를 받는다. 동료들은 버락이 잘생기고 자기소개서 성적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미셸은 별 관심이 없었다. 세 살 연상인 버락에 대한 미셸의 첫인상은 이랬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똑똑하고 흥미로운 배경을 지닌 ‘이야기하기에 즐거운 남자’였다.”

버락 역시 키가 크고 한눈에 커리어 우먼으로 보이는 단정한 정장을 입은 그녀가 매력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대번에 미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의 삶에 남자가 들어올 틈이 없다고 말했다. 버락은 자신의 책에서 그러한 미셸에게서 오히려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지 마음속 깊이 잘 알기 때문에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모든 계획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걸 안다는 듯한 희미한 기운”을 느꼈다고 꽤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강한 겉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그늘을 읽은 것일까?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숨겨진 면을 알고 싶었다.

버락의 첫 번째 데이트 신청은 멘토와 멘티 관계에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락은 자신이 지역사회운동가로 일하던 시카고 남부 교회로 미셸을 초대했다. 1989년 여름이었다. 초대받은 교회가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에서 가까운 데다 정식 데이트도 아니었기에 미셸은 초대에 응했다.

교회 지하에 도착하자 대다수가 흑인 싱글 맘인 군중이 버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세상’을 꿈꾸자며, 보통사람들이 그 간격을 좁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성적으로 말했다. 청중에게 연설하는 버락의 모습은 평소 정장을 입고 사무소에서 일하는 인턴사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흑인으로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자신보다 더한 도전과 어려움을 겪었을 그는 정장차림으로 법률사무소 직원들과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미셸은 ‘버락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두 세계에 모두 편안하게 어울리는 남자. 그 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가난한 흑인이 대부분인 청중을 향해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환경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연설하는 그에게 반한 것이다. 당시 미셸은 이십대 중반으로 프린스턴대 졸업논문에서 쓴 것처럼 ‘백인 급우들과 많은 부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며 ‘시들리 앤 오스틴’에서 놀라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버락을 만난 그해 여름 미셸은 자신이 이제 더는 그 세계 일원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셸이 버락에게 마음을 연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여름이 끝나자 버락은 하버드대로 돌아가고 미셸은 시들리 법률사무소에 남았다. 한 사람은 공부하고 한 사람은 일을 하면서 장거리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 무렵 미셸에게 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수술 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뜨고, 친한 친구마저 스물다섯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미셸은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영원한 것 없는 세상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과연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까,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나도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는데 이게 정말 내가 시간을 바치고 싶은 일인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서 있는 것처럼 어떤 열정이나 기쁨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당시 버락은 ‘하버드 로 리뷰(The Harvard Law Review)’ 최초의 흑인 편집장이 되면서 책을 써서 명성을 쌓아나갔고 미셸은 회의를 품으면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1991년 버락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로 돌아왔지만 시들리 같은 대형 로펌 대신에 작은 공익회사를 택한다. 버락을 보면서 미셸의 고민은 정점에 달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힐러리가 ‘유리천장’을 깨려고 노력했다면 미셸은 ‘생활인으로서의 영부인’모습을 보여준다.

로펌을 그만두고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그 뒤에 닥칠 ‘배고픔’을 생각하니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때 용기를 북돋워준 이가 바로 버락이다. 결혼해서 아끼고 산다면 수입이 적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희망적으로 얘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92년 10월3일에 결혼하고, 미셸은 그 이듬해 청소년을 위한 멘토 프로그램인 ‘시카고 공공연대’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협력기금을 모은다.

1996년 시카고대학병원으로 옮기는데, 그 병원이 공공연대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셸은 학생처 부처장과 대학사회봉사센터의 장으로서 학생 자원봉사활동을 지휘하면서 소외계층에 동기부여를 하는 다른 젊은 학생들을 지원했다. 그 와중에 1998년 첫딸을 낳았고 2001년 둘째딸을 낳는다. 남편 버락은 정계에 입문했다. 버락이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에 입성하게 됐으나, 미셸은 직장이 있고 어린 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카고에 남기로 한다. 2005년엔 시카고대학병원 대외협력 담당 부원장으로 승진했다.

“복권 당첨을 바라시지! ”

일하는 현대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영원한 숙제다. 아무리 사회보육시설이 잘돼 있어도 결국은 엄마가 육아 부담을 져야 하는 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바마 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버락은 저서‘담대한 희망’에서 일과 가족 사이의 균형을 잡는 문제에 대해 아내와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고백했다. 미셸이 종종 버락을 향해 자기 삶에만 몰두한다고 비난하고, 애들을 혼자 힘으로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2004년 ‘시카고트리뷴’과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미셸의 토로는 모든 일하는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을 표현한 말이다. “제가 남자들, 모든 남자에게서 발견한 건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는 나, 그 다음이 가족, 신(神)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남자들에겐 ‘나’가 제일 중요해요. 반면 여자들에게 ‘나’는 네 번째예요. 이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죠.” 이 시절 부부는 둘 다 공공부문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버락이 펴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인세로 버티던 시절,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한다는 남편 이야기를 듣고 미셸은 화를 냈다고 한다. 두 사람 관계가 가장 안 좋은 시절이었다. 버락이 연방 상원의원 출마계획을 내놓을 때도 미셸은 “말도 안 된다”고 반대했다.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또 책을 쓰면 된다”는 남편의 말에 미셸은 속으로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 황금 알을 가지고 내려오시든지’ 하고 조롱했다고 한다. 하지만 버락이 실제로 책을 쓰고 상원의원이 됐으니 미셸에게 황금 알을 가져다준 셈이다. 베스트셀러 ‘담대한 희망’은 수십억원의 인세를 안겨주어 집을 사는 데도 보탬이 됐다.

선거운동 기간 중 각종 인터뷰에서 미셸은 내놓고 남편 흉을 보아 “남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좋은 남자지만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고 바지도 문 앞에 아무렇게나 벗어놓는다. 신문도 본 그대로 펼쳐놓는다.” “잘 때 코를 골고 발 냄새를 풍겨 딸들이 아빠 침대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빵에 버터를 제대로 바를 줄 모르고 (버터를) 냉장고에 넣지 않아 녹아버릴 때도 있다.”

사실 두 사람의 성장환경은 판이했다. ‘베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미셸은 가족에 대해 전통적인 개념을 갖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집에 있고 아빠는 일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게 가족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하지만 버락은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는 세계를 여행하고 다녔다. 미셸은 “우리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부부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뭇 다른 생각을 품고 결혼한 셈”이라고 털어놓았다.

“두려움을 떨쳐버려라”

미셸은 버락이 상원의원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나는 가족을 위해서 조용한 생활을 원하는 만큼 내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미셸의 이런 모습은 전통적인 부인상과 거리가 멀다. 남편의 일에 대해 제지하고 간섭하면서 남편을 끌고 가는 모습이다. 남편에 대한 평가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남편을 너무 신성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었다가는 금세 실망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전통적으로 아내란 존재는 남편이 뭘 해도 다 사랑해주자는 식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아마 실제 결혼생활의 대부분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남편을 ‘메시아’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저 인간일 뿐이다. 다른 리더들처럼 보통 사람이라는 거다. 이 나라가 직면한 도전은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찾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전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직면한 도전은 이 사회에서 우리라는 개인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다.”

 

미셸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 자신감을 지닌 여성인지 짐작케 한다. 미셸은 선거운동 기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저는 뭐가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어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신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이 비현실적인 기대에 못 미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할 테니 말이다. 그저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 수다쟁이 맞다. 남편도 마구 괴롭힌다. 그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명한데다 강한 여자도 아주 잘 다룰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감이라는 거다. 나 같은 사람도 잘 다루는 위인이니 말이다.(웃음) …남편이 말을 잘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허공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각고의 노력과 얼마간의 눈물이 빚어낸 결과다. 누구나 변화를 달성하기까지는 힘이 든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자신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야한다. 두려움은 떨쳐버려야 한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 민주당의 일관된 메시지는 ‘가치의 정치’다. 대통령후보들은 기회, 책임, 공동체, 권한 같은 단어들을 자주 사용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때로 남성을 적대시하면서 ‘유리천장’을 깨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미셸은 미국 현대여성들이 생활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어떻게 소화하해내고 있는지 ‘생활인으로서의 영부인’모습을 보여준다. 모양이야 어떻든 이런 과정의 밑바닥에는 ‘우리는 할 수 있다, 예스 위 캔(Yes, we can)’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고취가 공통되게 관통하고 있다.

상대를 비난 않는 차분함

2008년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의 베네딕트 칼리지에서 그녀는 대다수가 흑인인 관중을 향해 ‘반대에 부딪힐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목표를 높게 가지라’고 외쳤다.

“우리 주변에는 회의론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 너는 훌륭하지 않아. 별로 똑똑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여러분 모두 그런 말을 들었고 그런 것에 장벽을 느꼈을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밀어 넘어뜨리고 여러분에게 한계를 지웁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의 키워드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이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 저와 같은 반짝이는 불빛 수만개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늘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조차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들으면서 자랍니다. 지금이 우리 모두가 그 반짝이는 불빛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 저는 누군가로부터 ‘너는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무시하고 과감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강한 현실감각을 가진 미셸의 장기(長技)는 선거운동 기간 중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 ‘차분함’으로 절정을 이뤘다. ‘래리 킹 라이브’ 인터뷰에서 매케인 후보가 버락을 ‘저 남자’라고 불렀을 때 불쾌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미셸은 “아니요”라고 답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후보들 사이에 오가는 공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 경제를 어떻게 바로잡을지, 의료보장제도는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진실된 대답입니다.”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여성으로서 페일린이 부통령후보에 출마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비난을 삼갔다. 오히려 ‘그야말로 묘기를 부려야 하는’ 이 역할을 떠맡은 페일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 문제는 남편이 이번 경선에 출마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바로 모든 여성이 미셸 자신과 세라 페일린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때 너무 솔직한 화법으로 ‘오바마의 고통스러운 반쪽’ ‘불만에 찬 흑인여성’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미셸의 행보는 선거 막바지부터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은 지금까지 갈수록 빛을 발하는 흑진주를 연상케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미국 대통령사(史)에서 미셸의 정체성이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참고도서’

‘‘미셸 오바마’(엘리자베스 라이트풋 지음, 박수연 홍선영 옮김, 부키)

‘버락 오바마의 삶’(스티브 도허티 지음, 김혜영 옮김, 송정)

‘담대한 희망’(버락 오바마 지음, 홍수원 옮김, 랜덤하우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버락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