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다. 각막을 기증해 두 사람을 눈뜨게 했으며,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인생 항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수많은 이에게 등대가 되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은 새삼 10여 년 전 세상을 뜬 마더 테레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여린 몸을 태워 빈민들의 삶에 불을 밝힌 테레사 수녀. 그도 말년에 사무치는 고독을 느꼈다. |
1년 동안 매일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 간병했던 고찬근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가 게시판에 ‘추기경의 마지막’을 일기 형태로 올렸다. 어느 날 추기경이 고 신부에게 묻는다. “고 신부, 고독해 보았는가?” “예, (평소에도) 고독하게 사는 편입니다.” 조언이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고 신부에게 날아온 추기경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추기경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하느님이)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작년에 돌아간 정명조 주교가 요즘 더 많이 생각나는구먼. 아마, 죽고 나면 자네나 나나 모두 하나일 거야. 내가 죽으면 자네 꿈에 나타나서 꼭 가르쳐주겠네.” 필자는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마치 추기경의 내면으로 들어간 듯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숱한 사람 속에 있었으나 이제 죽음 앞에 홀로 서서 절대고독을 느끼고 있는 한 성직자의 내밀한 자기고백, 그러면서도 그런 고독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순명하려는 치열함, 자신의 고백을 통해 후배 성직자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 이 모든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추기경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모두 헤아릴 수 있는 능력도 지혜도 없지만, 사후 나라를 울린 추모 물결이 이어진 것은 추기경이야말로 거짓을 품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 분임을, 또 자신의 고뇌를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분임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많은 의문을 불교철학에서 풀었던 나에게 ‘득도’에 이른 옛 선사들의 신비한 죽음은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 추기경의 죽음은 그것과는 또 다른 감동과 울림을 준다. 바로 ‘평범함의 위대함’이다. 평범함의 위대함 우리는 위대한 성직자라고 하면 평생 어떤 마음의 고통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절대 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의문’ 자체가 금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김수환 추기경을, 고민하는 성직자라는 의미에서 ‘햄릿형’이라고 하지만 추기경은 어떤 특별한 활동이나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존경받기보다, 하루하루 일상적인 삶 속에 주어지는 평범한 일과 기회를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대함으로써 성인(聖人)이 된 분이다. 그가 남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은 종교적 삶이란 게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사랑스럽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빛나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추기경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수행했다. 그가 걸어간 길은 특별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따를 수 있고 또 따라가야만 할 보편적인 길이었다. 인위적인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마치 어머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신 앞에 놓아버린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이 시대 가장 극적인 인문학적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가톨릭 성녀 마더 테레사의 삶이 궁금해졌다. 일생을 외국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바치고 선종한 마더 테레사는 겉으로는 한 오라기 의심도 갖지 않는 초인적 힘으로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었지만, 그의 내면 역시 어둠과 고독으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다만 남을 위해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온 존재를 흔들어대는 고뇌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정한 철녀’ 테레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곤히야 아녜스 즈약스히야다. 편의상 세례명을 쓰기로 한다).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26일 지중해 연안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알바니아계인 양친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상인으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깊은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 미사는 물론 매일 아침 자녀를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 나가 미사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테레사의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은 가정환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회고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잘 알고 있었다. 식탁에는 거의 매일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수다를 떠는 데 전기를 써서는 안 된다’며 전깃불을 끄고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먹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옷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에 불행이 닥쳐온 것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다. 테레사가 9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조국 알바니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피를 토하며 돌아왔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의사들은 ‘독살’이라고 했다. 남겨진 것은 달랑 집 한 채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업하던 사람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서 자수 제품을 팔았다. 성실한 어머니 덕분에 가게는 알토란처럼 커갔다. 역경에 처해도 좌절하지 않는 어머니 모습은 어린 테레사에게 큰 가르침이 됐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테레사의 어머니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열두 살 되던 해 테레사는 성직자의 꿈을 갖게 한 결정적 인연을 만난다. 다니던 성당에 주임교수로 부임한 얌브렌코비치 신부였다. 신부는 성당에 도서관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고전문학작품을 읽혔는데 테레사는 책읽기에 너무 열중해 어머니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신부는 또 전 세계 선교사들의 활동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 벵골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활동이 테레사를 사로잡았다. 테레사는 태어나서 처음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특히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크면 자신도 선교사가 되어 인도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다. 테레사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수녀회에서 수녀들을 모집해 인도 각지로 보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테레사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그분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거라. 네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다르질링과 캘커타 어머니의 이 말은 평생 테레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침반이 됐다. 그녀는 예전 수녀들이 그랬듯 오랜 배 여행 끝에 인도 히말라야 산기슭 다르질링이란 곳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은 부자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할 만큼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본명 아녜스를 버리고 테레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의 성녀 테레지아에서 따온 것이다. 수련기간이 끝나고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있는 로레타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과 캘커타는 너무 달랐다. 수녀원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수녀원은 캘커타에서도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에 있었고, 슬럼가와 공장, 유동인구가 많은 철도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코앞에 있는 쓰레기장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바람이 불면 악취가 수도원으로 흘러들어왔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17년이나 일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가운데에 아쉬움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질병이 그칠 날이 없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수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수녀원 규칙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조용하고 청결한 방에서 창으로 슬럼가를 내다보며 ‘내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좋은가?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버려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출가할 때 다짐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이 먼 나라까지 온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들,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 손발 없는 아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 병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어떤 때는 도와달라는 환청이 들렸다.
수녀원을 떠나 거리로 하지만 수녀원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든 곳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환속이라면 개인의 결정에 달렸지만, 수녀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 개별 활동을 하고 싶어 했기에 교회 내부에서 그것을 받아줄 리 없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를 받은 대주교는 예상대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캘커타는 정치적 종교적 대립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수녀가 혼자 거리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끈질겼다. 무려 2년여 기다림 끝에 마침내 교황으로부터 ‘1년에 한해 수도원 외 임시거주 허가’를 얻어냈다. 말이 2년이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2년 동안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테레사 수녀의 마음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 평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수녀원을 떠나 푸른 물색 줄이 그려진 하얀 사리(인도인들의 평상복) 세 벌과 작은 십자가, 묵주 하나를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빈민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선 캘커타에서 열차로 10시간가량 떨어진 갠지스 강가 파트나에 있는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호하는 법, 주사 놓는 법, 의약품 취급하는 법, 치료나 수술을 돕는 법, 응급처치, 출산을 돕는 법 등 기본 의료교육을 받았다. 외국인 국적으로는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적까지 인도로 바꿨다. 넉 달 간 수련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1948년 12월초 캘커타로 돌아왔다. 지금과 달리 60여 년 전 캘커타는 슬럼 그 자체였다. 마을 한가운데 저수지는 큰 웅덩이 수준이었는데 주민들은 그 물을 마시고 거기서 빨래도 했다.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악취를 풍겼다. 진료소도 약국도 학교도 없었다. 수녀는 일단 이 마을의 어른들부터 만났다. 학교를 열겠으니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웅덩이 근처 나무 아래에 학교를 열고, 주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쓰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노상교실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보였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불타는 듯한 태양 볕 아래서 허름한 면 사리를 걸친 외국인 수녀가 슬럼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장소를 제공하겠다거나 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 수녀원 학교에서 수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한두 명 찾아와 수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장소가 마련되고 협력자들도 생기자 제법 학교 모양새가 나기 시작했다. 수녀가 제일 신경 쓴 것은 청결이었다. 아이들에게 몸 씻는 것부터 가르쳤다. 몸을 씻고 온 어린이에게는 상으로 소금을 주었다. 여자애들에게는 재봉도 가르쳤다. 아이들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쁜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면 곧바로 고쳤다.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와 약국도 열고 싶었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교회’ 탄생 1950년 10월7일 단 열두 명의 수녀밖에 없던 테레사 수녀그룹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해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사랑의 선교회’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서원으로 두었다. 남을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돕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수녀회가 사랑의 선교회 수녀 자격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 그밖에 ‘성격이 명랑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굳센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의 강조였다. 수녀는 또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교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선교회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도 내부에서의 반대와 오해였다. 가장 큰 오해는 테레사 수녀가 힌두교 중심지에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러운 사람들로 더럽힌다는 항의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데모가 숱하게 일어났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우리를 죽이면 하느님 계신 곳에 더 빨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힌두교도들의 반발은 두 가지 사건으로 잠잠해졌다. 불만을 접수하고 선교회에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수녀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몸을 씻기고 간호해주는 것을 본 경찰은 오히려 성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외국인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주장대로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와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 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게 하라.” 한번은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이 결핵 말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그가 몸을 누인 곳은 사랑의 선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아와 테레사 수녀에게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30년간 사원에서 신에게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제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신 신께 경배하게 된 것은 저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이웃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선교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마더 테레사가 전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와 보니 남자는 이미 숨이 끊겼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외롭게 죽어간 사람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듯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수녀가 죽어 쓰러진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간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도도 3세기 반에 걸친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캘커타가 있는 서벵골에서는 분쟁이 유독 격렬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에 따른 인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47년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갈라졌다. 동 파키스탄은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로 완전 독립한다. 이때 인도가 방글라데시 편을 드는 바람에 서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늘 그렇듯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이었다. 목숨만 겨우 건진 사람들은 대도시 캘커타로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넘쳐나는 캘커타에 난민이 몰려들자 캘커타는 빈민소굴이 됐다. 공터뿐 아니라 공원, 도로까지 판잣집으로 메워졌다. 1971년 시청 발표에 따르면 캘커타 전체 인구 1000만 중 노숙자가 40만이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심지어 아이도 길에서 낳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흔했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상상이 간다. 어느 날은 길에서 쥐와 개미에게 반쯤 먹혀버린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시궁창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데려와 돌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니 천사가 되어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3시간 후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수녀는 사람이 홀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씨앗이 되어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인도인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은 단지 물질이나 간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그들 각자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선교회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은 이들은 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중요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다고 말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구더기가 이 여인의 몸을 파먹고 있었다. 여인을 침대에 눕히자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테레사는 “일찍이 사람 얼굴에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여인은 “감사해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지만 테레사 수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만일 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추워요, 배고파요 하면서 어서 나에게 먹을 것과 옷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여인은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사랑을 주고 갔다.’ 사랑의 선교회 활동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됐다. 테레사 수녀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시설을 만들고 수녀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 런던 멜버른 등 선진국 대도시에는 육신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멜버른 시내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창문은 닫혀 있었고 실내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서 불을 켜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수녀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겠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란 현대사회의 섬처럼 분리된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1979년 12월11일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모든 곳에 캘커타가 있다’고 한 그녀의 연설은 나눔철학의 정점을 보여줬다. 마더 테레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면 누구나 ‘사랑의 선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의 고뇌 그녀의 일생은 믿음과 복종,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불굴의 소망으로 점철된 삶이다. 하루 중 1분 1초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 그녀는 기쁨으로 충만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겼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께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에너지는 침묵과 묵상이라는 내적 수행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내적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선교회 사업을 시작하고 3년 뒤인 1953년 3월 대주교에게 보낸 고해성사 편지에는 이런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제 안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사업’(선교회)을 시작한 즈음부터 계속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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